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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평대군의 시한 자/한시(한국) 2009. 4. 4. 12:17
세샹 사람들이 입들만 셩하여셔
제 허물 전혀 닛고 남의 흉 보는괴야
남의 흉 보가라 말고 제 허물을 고티과뎌
~인평대군(麟坪大君;1622~1658)~
<해설>
세상 사람들이 입들만 그래도 살아서 제 허물을 모두 잊고 남의 흉만
보는구나, 남의 흉을 보려 하지 말고 제 허물들이나 고쳤으면 얼마나
좋으리요.
◈ 배경
인평대군은 인조대왕의 제 3왕자로서 이름은 요이고, 자는 용함(用涵)인데 호는
송계(松溪)이다. 그는 천성이 효우(孝友)하고 인서(仁恕)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했다.
저서로 연행록(燕行錄), 산행록(山行錄) 및 송계집 8권이 있다. 효종 10년 37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 무렵의 인물로서 박연(朴淵)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화란 사
람이며 본명은 존 웰테브레였다. 인조 6년 동국인 2명과 제주도 표류하였는데 서울
로 압송되어 훈련대장 구인후(具仁垕)의 감독아래 있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박
연의 동료 2명은 청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는데 박연은 병서에 정통하고 홍이포(紅夷
砲)의 제조법도 전했다고 한다. 이엉 효종 4녀 화란인 하멜이 동국인 36명과 더불
어 제주도에 또 표류했으며 박연은 이때 통역과 안내의 소임을 맡았다. 서양인으로
우리나라에 표류한 자는 종종 있었으나 우리나라에 영주하기는 그가 첫 번째 인물
이며 우리나라의 의복을 늘 입었고 우리나라 여자와 혼인하여 1남 1녀를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