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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조대왕의 시
    한 자/한시(한국) 2009. 4. 4. 10:52

    내라 그리거니 네라 아니 그릴넌가

    千里蠻鄕에 얼매나 그리는고

    不如歸라 말고라 내 안 둘 듸 업세라

                   ~인조대왕(仁 祖 大王;1595~1649)~

    <해설>

    나도 네가 그립기 그지없는데 너라고 하여 그립지 않을 리가 없겠는가,

    천리나 멀리 떨어진 오랑캐 땅에서 얼마나 그립겠는가, 창밖에서 슬피

    울고 있는 저 접동새야 돌아감만 못하다고 하지를 말아라. 이 안타깝고

    그리운 심정을 둘 곳이 없구나.


    ◈ 배경

    인조대왕은 조선조 제 16대 왕으로서 휘(諱)는 종(宗)이고 자는 화백(和伯), 호는

    송창(松窓)이었다. 선조대왕의 손자로서 정원군(定遠君)의 장자였고 반정을 일으켜

    왕에 추대되었다. 그러나 이괄의 난, 5년의 정묘호란, 14년의 병자호란 등 다난한

     

    일생이었다. 1636년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했는데

    이때 세자인 소현(昭顯)과 왕자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여러 신하들과 더불어 심양으

    로 끌려갔다. 이 시조는 소현세자가 심양으로 간지 3년 만에 한시 1편을 적어 보내

     

    왔는데 왕이 이걸 보고 애통함을 금하지 못한 채 이 시조를 읊었다고 한다. 의령이

    본관인 남선(南銑;1582~1654)은 자를 택지(澤之)라 하고 호는 회곡(晦谷)인데 좌의

    정 김명원(金命元)의 외손이었다. 그는 선조 39년 진사과에 올랐으나 광해주 때에

     

    는 벼슬을 일체 마음에 두지 않았다. 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고산현감 등을 지냈

    는데 병자호란 때에는 남한산성에 있었고 이듬해 평안관찰사로서 청나라에 들어가

    우리나라의 포로 수천 명을 데리고 돌아옴은 큰 공이었다. 회곡은 청렴결백하기로

     

    유명했으며 벼슬이 다시 올라 대사헌, 대사간,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효종

    6년 향년 73세로 세상을 떠났다. 본관이 여흥인 졸당(拙堂) 민성휘(閔聖徽;1582~

    1647)는 자를 사상(士尙)이라 하였는데 그는 일찍 조실부모하고 종부(從父) 유경(有

     

    慶)에게 양육되었다. 열심히 학문을 닦아 광해군 원년 문과에 급제하고 정계에 나섰

    는데 처형(妻兄) 정조(鄭造)가 ‘폐모론’을 주장하며 그를 자기 당에 끌어들이려 하였

    지만 응하지 않았다. 인조반정 후 부승지가 되었다가 이어 영남과 호남의 관찰사를

     

    지냈으며 이괄의 난 때 공이 있었다. 그러다가 청음 김상헌과 같이 심양에 끌려갔

    는데 풀려나고 호조와 형조판서로 있으면서 자주 연경(燕京)을 드나들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병으로 일생을 마치었는데 향년 65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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