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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헌의 시한 자/한시(한국) 2009. 4. 3. 22:11
가노라 三角山아 다시 보쟈 漢江水야
古國山川을 떠나고쟈 하랴마는
時節이 하 殊常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김상헌(金尙憲;1570~1652)~
<해설>
나는 떠나간다 삼각산아,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다시 보자 한강물아,
어쩔 수 없이 이 몸은 고국의 산천을 떠나려 하지마는 시절이 하도
뒤숭숭하니 과연 살아서 다시 돌아올지 어떨지 모르겠구나.
◈ 배경
김상헌은 선원 김상용의 아우이다. 청음은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선조 29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제학, 예조판서, 우의정을 거쳐
효종 초에는 좌의정까지 지낸 사람이다. 인조 14년 남한산성이 청군에게 포위되자
끝내 싸울 것을 주장한 척화파의 한 사람으로서 여러 사람이 모여 화의를 의논하고
병조판서 최명길이 국서(항복문서)를 작성하자 이것을 빼앗아 찢어 버리기도 했다.
그리고 외치기를 “제공께서 어찌 이와 같은 굴욕적인 화의를 하려 합니까“하고 말
했으며, 다시 인조를 뵙고서 ”군신이 하늘에 맹세하고 성을 사수해야 합니다“하고
주장했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하여 심양에 끌려갔는데 옥중에서 6년
동안 갇혀 있으면서도 시종일관 청인에 굽히지 않았으므로 청인들도 의사(義士)로써
오히려 감탄했다고 한다. 그 뒤 귀국하여 벼슬이 좌의정까지 올라갔는데 그가 세상을
떠나자 문정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침공한 왜군의 장수 또는
명나라 군인으로서 그대로 우리나라에 눌러 앉아 살게 된 사람도 더러 있었다.
김충선(金忠善;1571~1642)은 본디 왜군의 장수인데 본명이 사야가(沙也可)이다.
가등청정(加藤淸正)의 부장으로 조선에 건너왔으며 경상병사 박진(朴晋)에게 귀순
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안동 장씨인 목사 장춘점(張春點)의 따님과 혼인하여 5남 2녀
를 얻고 김충선이란 이름까지 나라에서 받았던 것이다. 인조 2년 이괄의 난 때 부장
인 서아지(徐牙之)를 잡아 베었고 또 병자호란 때에는 경주 쌍령 고개에 진을 치고
청병 5백여 명을 베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