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2년 3월 20일 우리나라에서 일반인이 전화를 사용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한성(서울)에서 인천 사이에 민간통신용 전화가 처음 개통된 것. 이는 궁내부에
전화가 개통 된지 6년만의 일이다. 1896년 10월 2일 국내 최초로 궁중에서 인천
감리서, 정부 부처를 연결하는 전화가 설치되었지만, 이 전화는 황실 소속이어서
일반인들은 이용할 수 없었다. 당시 전화는 텔레폰을 음역한 덕진풍(德津風),
덕률풍(德律風) 또는 말 전하는 기계란 뜻의 전어기(傳語機) 등으로 불렸다.
자석식 전화기를 사용했기 때문에 교환원이 수동으로 통화를 연결했다. 감도가
매우 나빠 통화를 할 때는 소음이 생기지 않게 숨소리마저 죽여야 했다. 전화
예절도 대단히 엄격해서 황제의 전화를 받는 신하들은 관복을 정제하고 큰절을
네 번 한 뒤 엎드려서 통화해야 했다. 뒷날 순종은 부왕인 고종의 능에 전하를
설치해 아침저녁으로 전화곡을 올리기도 했다. 민간전화는 처음엔 전화소에서만
통화가 가능했다. 통화가능시간은 오전 7시에서 오후 10시, 통화료는 5분에 50전
이었다. 다음 사람이 기다리고 있으면 통화는 10분을 넘길 수 없었다. 통화 중 말
다툼을 하거나 저속한 언어, 욕설을 하면 교환원이 통화를 중단시키기도 했다.
1902년 6월부터는 가정에서 전화를 가설해 쓸 수 있었다. 한성에서 최초 가입자
2명으로 시작해 인천, 수원 등 도시 중심으로 보급을 늘려갔다. 가입자는 대부분
외국인이나 특권층이었다. 초창기 전화의 최대 수혜자는 김구 선생이었다. 당시
명성황후 시해에 분노한 청년 김구는 일본 장교를 때려 죽여 사형을 선고 받았다.
뒤늦게 사건의 내막을 전해들은 고종은 사형집행 직전에 전화로 취소명령을 내려
김구의 목숨을 살렸다. 이때가 궁내부 전화를 설치한지 한 달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