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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익의 시한 자/한시(한국) 2009. 3. 31. 23:31
綠楊이 千萬綠인들 가는 春風 잡아매며
探花蜂蝶인들 지는 곳을 어이하리
아모리 思郞이 重한들 가는 님을 잡으랴
~이원익(1547~1634)~
<해설>
푸른 버들가지가 천 갈래 만 갈래의 실 같다. 하더라도 가는 봄바람을
잡아맬 수 있을 것이며, 꽃을 찾아다니는 나비라도 지는 꽃은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랑이 중하기는 하지만 싫다고
가는 님은 어찌할 것인가. 그것도 자연의 이치일테니 어쩔 수 없는 것이다.
◈ 배경
이원익은 자를 공려(公勵)라 하는데 태종의 왕자 익녕군(益寧君)의 현손이었다.
선조 2년 문과에 급제하고 율곡 이이의 신임을 받아 벼슬길이 순탄했다. 임진
왜란이 나자 이조판서로서 평안도 도순찰사를 겸했으며, 선조 28년에는 우의정
으로 있었는데 이순신이 무고로 잡혀 올라와 거의 죽게되자 그를 두둔하여 죄가
없음을 극력 변명해주었다. 그의 치적 중 유명한 것은 경기도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여 서민에게 큰 혜택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듬해 아계 이산해가
영의정이 되자 북인이 득세를 하였다. 대북파인 이산해가 영의정이 되어 북인이
득세했으나 여섯 달 만에 영의정의 바통을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이어 받
았고 다시 그 바통을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이 이어 받았다. 그러다가 춘호
유영경이 영의정에 올랐으나 춘호는 소북파였기 때문에 대북파는 이를 달가와
하지 않았던 것이다. 광해군은 이때 유자신(柳自新)의 사위였는데 유자신은 유영
경과 친한 사이였다. 장인을 통해서 광해군을 세자로서의 자기 지위를 지키려
했던 것이었다. 선조대왕은 신임하는 유영경과 더불어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할
것을 의논했는데 선조 41년 57세라는 나이로 선조대왕이 갑자기 승하하셨던 것
이다. 아슬아슬하게 세자 지위를 유지하고 다시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양심을
품고 유영경을 경흥(慶興)에 귀양 보내고 약사발을 내려 죽였다. 이로서 소북파는
몰락하고 대북파인 유자신의 아들 유희분(柳希奮), 이이첨, 정인홍 등이 조정의
실권을 잡았다. 광해군은 서인 오리 이원익을 영의정에 다시 앉히고 처음에는 정
치를 제법 잘 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이첨과 정인홍은 춘호 유영경의 일파를 죽이
고나자 이번에는 선조의 장자인 임해군(臨海君)을 죽일 음모를 꾸몄다. 애당초
임해군이 선조의 세자가 될 분이었으나 임진왜란을 거치는 동안 나이가 들게 되고
주색을 좋아했기 때문에 세자의 자리를 놓쳤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