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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귀의 시한 자/한시(한국) 2009. 4. 1. 23:23
님을 미들 것가 못 미들슨 님이시라
미더 온 時節도 못 미들줄 아라스라
밋기야 어려워마는 아니 ale고 어이리
~이정귀(李廷龜;1564~1635)~
<해설>
임을 믿을 것인가? 아마도 못 믿을 것은 임이로다. 믿어오던 때도
못 믿을 것인 줄을 알았다. 그러나 믿기는 어렵지만 아니 믿고 어찌
하겠는가?
◈ 배경
이정귀는 본관이 연안(延安)으로서 자는 성징(聖徵)이고 호는 월사(月沙)이다.
선조 23년 문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 때에는 주청사(奏請使)로서 명나라에 가기도
했다. 문장이 뛰어나 조선조 중기의 ‘문장 사대가’의 하나인데 나머지 세 사람은 상촌
(象村) 신흠(申欽), 계곡(谿谷) 장유(張維), 택당(澤堂) 이식(李植)을 말한다. 저서로
월사집이 유명하다. 대북파 정인홍과 이이첨은 조정에서 서인을 완전히 몰아내려고
하였다. 그래서 음모를 꾸며내게 되었는데 선조의 여섯째 아드님인 순화군(順和君)
이 역적음모를 하였다는 상소문을 황해병사인 유공량(柳公亮)을 시켜 올리게 하였다.
이 사건에 석주 권필의 시가 문제되었다.
宮柳靑靑鶖亂飛/ 滿城冠盖媚春暉/ 朝家共賀昇平樂/ 誰遣危言出布衣,(대궐의 버들이
푸르고 푸르렀는데 꾀꼬리가 어지럽게 날고, 서울에 가득한 갓 쓴 자들이 봄을 위해
아첨 하는구나, 조정과 사사로운 집들이 모두 태평성세를 즐기는 이때에 누가 감히
위험한 소리를 더구나 아직 벼슬 못한 자가 지껄이겠는가.) 지금의 말로 한다면 상당
히 반정부적인 불만이 가득한 시 이다. 모함의 구실을 찾고 있던 자들이 이 시를 트집
잡아 순화군을 함정에 빠뜨렸다. 더구나 광해군의 부인이 유씨(柳氏)이므로 왕비를
모함한 시라고 했던 것이다. 석주는 이 시 때문에 잡혀가 매를 맞고 귀양을 가다가
결국 그 장독(杖毒)으로 인하여 죽었다. 이때 김직재(金直哉) 등 돈 많은 부자 60여
명이 모두 죽었는데 대북파가 그들의 재산을 빼앗기 위해서였다. 이것이 임자사화
(任子士禍)라 불리는 것으로서, 석주 권필이 죽게 된 것은 그가 서인의 영수 송강
정철의 사랑하는 제자였기 때문이다. 광해주 4년의 일이었다. 광해주 5년 다시 끔찍
한 일이 일어난다. 인목대비의 친정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이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모함이다. 그리고 그들의 일당이라 하여 양반집의 서자로서 차별대우를 받고
있던 사람들이 박응서(朴應犀)를 두령으로 삼아 무륜당(無倫堂)이라는 결사를 조직했
는데 이것을 이용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김제남 일가는 모두 살해되었고 어린 영창
대군은 강화섬에 보내져 그곳에서 무참하게도 방에 불을 때어 질식케 하였다. 당시
역적으로 몰리면 남자는 젖먹이라도 모두 죽음을 당했고 여자는 관에 딸린 종이 되어
멀리 보냈다. 인목대비의 어머니이고 김제남의 부인인 노씨(盧氏)도 멀리 제주도로
보내졌다. 노씨 부인은 그곳에서 갖은 학대를 받으며 술을 빚는 일을 하였는데, 이때
의 제주 목사 양호(梁濩)란 자가 “이 술은 대비의 어머니가 빚은 술, 모주(母酒)일세,
자 마시세“하고 버렸으므로 모주는 술을 가리키는 말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술 망난
이를 모주망태라 하는데, 이것은 술 먹고 거드럭거리는 양호 같은 자를 비웃는데서
나온 말이었다. 그거야 어쨌든 폭정을 거듭하고 이성을 잃게 된 광해주는 당시의
상식으로서 도저히 상상도 못할 폐모론(廢母論)을 들먹거렸다. 즉 영창대군의 어머
니인 인목대비를 서인으로 만들어 추방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친어머니는 아니라도
국모(國母)는 국모이다. 백사 이항복이 이 폐모론에 반대하여 귀양을 갔고, 광해주
는 인목대비를 서궁(덕수궁)에 감금하고 죽기만을 기다렸다. 영창대군을 죽이고 나
자 정인홍이 영의정에 올랐고 대북파의 권세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그렇건만 그
들은 또 선조대왕의 왕자를 없앨 것을 음모했다. 그래서 제물로 택종된 것이 정원군
(定遠君)의 둘째 아들 능창군(綾昌君)이었다. 능창군은 선조대왕의 손자로서 키가
육척이나 되는 장부였다. 능창군을 옭아 넣는데는 무륜당의 잔당으로서 뒤늦게 잡
힌 서양갑(徐羊甲)을 고문하여 능창군이 역모를 한다는 자백을 받았다. 이리 하여
능창군은 죽게 되었는데, 능창의 형님 능양군(綾陽君)은 동생을 구명하고자 동분서
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