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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흠의 시
    한 자/한시(한국) 2009. 3. 28. 11:48

    桐千年老港藏曲 ~ 동천년노항장곡

    梅一生寒不賣香 ~ 매일생한불매향 

    月到千虧餘本質 ~ 월도천휴여본질

    柳經百別又新枝 ~ 유경백별우신지 

     

    <해설>

    오동나무는 천년이 되어도 항상 곡조를 간직하고,  

    매화는 일생동안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달은 천년을 이지러저도 그 본질이 남아있고,

    버드나무는 백번 꺾여도 새 가지가 올라온다. 

     

    내 가삼 혜린 피로 님의 양자 그려 내여

    高堂 素壁에 거러 두고 보고지고

    뉘라서 리별을 삼겨 사람 죽게 하는고


    <해설>

    나이 답답한 이 가슴을 베어 헤치고 그 속의 피로 님의 얼굴을

    그려서 내 집의 바람벽에 걸어두고 보고 싶구나, 어느 누가 애당초

    이 이별이란 두 글자를 만들어 내어 이처럼 사람의 속을 타게 만드는걸까.

     

    곳 디고 속닙 나니 시절도 변하거다

    믈 소개 푸른 버레 나뷔 되야 나다닌다

    뉘라서 조화를 자바 千變萬化하는고

                                     ~象村 신흠(申欽;1566~1628)~

    <해설>

    꽃이 지고 속 닢이 돋아나니 시절도 바뀌었다. 물속의 푸른 벌레가

    다시 나비가 되어 날아다닌다, 누가 이처럼 조화를 마음대로 하여

    천변만화를 하게 하는 것일까.


    ◈ 배경

    아무래도 일이 복잡하게 되었다. 율곡은 자기가 초를 잡아준 상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았으나, 연명 상소이니만큼 어찌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만 송강 정철만은 그

    속에다 넣는 것이 마음에 꺼려 “송강은 깨끗한 인물로서 심의겸 같은 사람에게 붙을

     

    인물도 아니고 또 그는 내가 추천한 사람인데 지금 나는 언관(言官)으로 있으면서

    그대의 말을 들어준다고 하면 나는 소인(小人)이 되고 말 것이 아닌가?“ 내암

    정인홍도 이율곡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다시 상소문을 만들어 임금님께 올렸다.

     

    그 글에 이르기를 “정철은 심의겸의 당이 이니옵거늘, 신이 요전에 그런 글을 올린

    것은 그 실상을 잘 알지 못한 탓이오니, 그 죌 신의 벼슬을 갈아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이 상소문에 청봉(晴峰) 윤승훈(尹承勳)이 들고 일어나 반박했다.

     

    “본디 사람이란 뜻이 같고 마음이 맞아야 비로소 친밀해지는 법인데 정분이 두텁다

    해놓고 다시 또 판이하게 같지 않다는 것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윤승훈(15

    49~1611)은 본관이 해평(海平)이고 자를 자술(子述)이라 하였는데 벼슬이 영의정

     

    까지 오른 사람이다. 특히 임진왜란 때에는 군량미 조달(調達)에 공이 많았는데,

    그로서는 옳은 말을 한 셈이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율곡만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다. 정인홍을 두둔하다가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 휩쓸린 꼴이었다. 결국 율곡

     

    은 대사헌의 벼슬을 내놓게 되었지만, 새로이 대사헌이 된 송와(松窩) 이기(李墍)가

    율곡을 호되게 몰아세웠다. “율곡 이이는 윤승훈을 헐뜯고 외직으로 나가게 했는데,

    시 그도 외직으로 내보내는 게 마땅합니다.“ 동인둘로 볼 때 율곡이 중립적 인물이

     

    아니고 정철을 구해주려 한 것만 봐도 ‘서인’이 틀림없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는 종실(宗室) 경안군(慶安君) 요(瑤)가 율곡을 적극 변명하여 이직으로 나가지

    않게 되었고, 오히려 율곡은 병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율곡은 병조판서로 있으면서도

     

    격무(激務)에 시달렸다. 함경도 지방에서 여진족 니탕개(尼湯介)가 극성을 부렸기

    때문에 그 일을 처리해야 했고 워낙 몸이 약했기 때문에 임금이 부르자 공교롭게도

    졸도를 하여 집에서 눕게 되었다. 그러자 이발, 송응개, 허봉(許葑)이 이 일을 가지

     

    고 들고 일어났다. 허봉은 초당 허엽의 아들로서 홍길동전(洪吉童傳)을 지은 허균

    (許筠)의 형이고 저 허난설헌(許蘭雪軒)의 오빠이다. “임금께서 부르셨는데 집에 누

    워있다니 교만하고 방자한 짓이다.“ 여기에 또 도승지 박근언(朴謹言)까지 공격의

     

    화살을 퍼부었다. “이이란 자는 본시 장삼 입고 머리 깍은 중으로서(금강산에 들어

    갔던 일이 있었다.) 속세에 돌아오자 권문(權門)으로 호강하고, 사림에 드나들며 자

    기 생각에는 당대에 제일이고 세상 시비 밖에 뛰어났다 하여 혹은 심의겸을 단점을

     

    말하고 혹은 김효원의 장점도 말하여 지극히 공평하다는 이름을 얻기에 급급하다.

    그러면서도 위로는 상감을 속이고 아래로는 국민을 현혹시키고 있다...“ 이 상소로

    율곡은 아주 위험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계(牛溪) 성혼(成渾)

     

    이가 적극적으로 운동하녀 율곡을 구해주었다. 박근언, 허봉, 송응개는 오히려 율곡

    을 모함했다는 죄로 귀양을 가게 되었지만, 율곡 같은 도덕군자도 갖은 모함을 받은

    걸 볼 때 얼마나 당쟁이 심했는지 알만한 것이다. 신흠은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자는 경숙(敬淑), 호는 상촌(象村), 선조 19년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좌랑(兵曺佐郞)

    을 지냈는데 영창대군(永昌大君) 사건에 연류 하여 고생을 하였으나 이내 풀려났다.

    인조 때 좌우 정승을 거쳐 영의정까지 올랐다. 그는 일곱 살 때 어버이를 여의었으

     

    나 외조부인 송인수(宋麟壽의 훈육을 받았고 학문이 뛰어나 당대의 한문 대가였었

    다. 선조 16년 그이 장인 송응개가 율곡을 모함하려다가 오히려 귀양을 갔고, 이때

    율곡을 두둔하여 율곡의 당이라고 동인들에게 공격을 받기도 했다. 시조 20수가 전

     

    하며 저서로 상촌집(象村集)이 있다. 선조 26년 왜구가 서울에서 물러가자 의주(義

    州) 용만(龍灣)에 있던 대왕이 다시 환경하셨다. 미증유의 국난을 맞아 이때만은 당

    파싸움이 없었으나 선조 27년 다시 당쟁이 고개를 들었다. 선조께서는 오음 윤두수

     

    와 송강 정철을 오랫동안 정승의 자리에 두었으므로 이들을 갈고 새로이 서애 유성

    룡과 두암(斗巖) 김응남(金應南), 약포(藥圃) 정탁(鄭琢)을 새로 발탁했다. 정탁(15

    26~1605)은 본관이 청주(淸州)이고 자는 자정(子精)이다. 퇴계와 남명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 이순신, 김덕령을 추천한 일로 유명하다. 특히

    원균의 모함으로 이순신이 거의 죽게 되었을 때 극력 힘을 써서 이를 구해 주었던

    사람으로 이때 우의정이 되었다. 또 김응남(1546~1598)은 본관이 원주이고 자는

     

    중숙(重淑)이고 특히 치정(治政)에 뛰어났고 백성들이 어버이처럼 따랐다. 영의정은

    서애 유성룡이 임명되었다. 신흠은 인조 때 영의정 을 지냈는데, 이정구(李廷龜)

    장유(張維),이식(李植)함께 조선 4대 문장(四大門章)으로 꼽힌다. 아우

     

    감(鑑)은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왕조실록 복간에 공이 컸고, 흠의 아들 문

    충공(文忠公) 신익성(申翊聖:16세손)은 인조 때 병자 척화 5신(丙子斥和五

    臣)의 한 사람으로 청나라 심양(瀋陽)에 잡혀갔었다. 그의 아우 익전(翊全)

     

    은 김상헌(金尙憲)의 문인으로 이름난 당대의 문한(文翰)이었다. 또 숙종

    때 명신 문숙공(文肅公) 신정(申 晸)은 익전의 아들이고, 고종 때 좌의정을

    지내고 봉조하(奉朝賀)가 된 문경공(文敬公) 신응조(申應朝)는 정(晸)의 6대

     

    손이다.정언공파는 문신집안으로 특징지어진다. 신흠(申欽1566명종21∼1628

    인조6).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평산(平山).자는 경숙(敬叔),호는 현헌

    (玄軒),상촌(象村),현옹(玄翁) 방옹(放翁).증판서 세경(世卿)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우참찬 영(瑛)이고, 아버지는 개성도사 승서(承緖)이다. 어머니

    는 은진 송씨(恩津宋氏)로 기수(麒壽)의 딸이다. 송인수와 이제민(李濟民)

    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1585년(선조 18) 진사시와 생원시에 차례로 합격

     

    하고 1586년 승사랑(承仕郎)으로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1583년에 외숙인 송응개(宋應漑)가 이이(李珥)를 비판하는 탄핵문을 보고

    “이이는 사림(士林)의 중망을 받는 인물이니 심하게 비난하는 것은 불

     

    하다.”고 하였다.이 일로 당시 정권을 장악한 동인으로부터 이이의 당여

    (黨與:정치적인 견해를 같이하는 집단 또는 사람)라는 배척을 받아 겨우 종9

    품직인 성균관학유에 제수되었다. 그 뒤 곧 경원훈도(慶源訓導)로 나갔으며

     

    광주훈도(廣州訓導)를 거쳐 사재감참봉이 되었다.  1589년 춘추관 관원에 뽑

    면서 예문관봉교,사헌부감찰,병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의 발발과 함께 동인의 배척으로 양재도찰방(良才道察訪)에 좌천되었으나 전

     

    란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삼도순변사(三道巡邊使) 신립(申砬)을 따라 조령전

    투에 참가하였다. 이어 도체찰사(都體察使) 정철(鄭澈)의 종사관으로 활약했

    으며, 그 공로로 지평(持平)에 승진되었다.1593년 이조좌랑에 체직, 당시 폭

     

    주하는 대명외교문서 제작의 필요와 함께 지제교(知製敎)·승문원교감을 겸

    대하였다. 1594년 이조정랑으로서 역적 송유진(宋儒眞)의 옥사를 다스리고

    그 공로로 가자되면서 사복시첨정으로 승진했으며, 곧 집의(執義)에 초수

    (超授:뛰어넘어 제수됨)되었다. 같은 해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청하는 주청

     

    사 윤근수(尹根壽)의 서장관(書狀官)이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그 공로로 군기

    시정에 제수되었다.1595년 함경도어사와 의정부사인을 거쳐 장악원정(掌樂

    院正),성균관사예(成均館詞藝),종부시정,세자 시강원필선(世子侍講院弼善)·

     

    홍문관교리·홍문관응교·의정부사인·홍문관전한(弘文館典翰)을 차례로 역

    임하였다. 1599년 선조의 총애를 받아 장남 익성(翊聖)이 선조의 딸인 정숙

    옹주(貞淑翁主)의 부마로 간택되어 동부승지에 발탁되었다. 같은 해 형조참

     

    의 겸 승문원부제조를 거쳐 병조참지,우부승지,이조참의,예조참의,대사간,병

    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601년 '춘추제씨전 春秋諸氏傳'을 합찬(合纂)한 공으

    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자되고 곧 예문관제학되었다. 1602년 충무위

     

    부호군(忠武衛副護軍)으로 좌천되었다가 곧 오위도총부부총관을 거쳐 예조참

    판에 발탁되었다. 이어서 병조참판,홍문관부제학,성균관대사성,도승지,예문

    관제학,병조참판,도승지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1604년에 자헌대부(資憲大夫)

     

    에 오르면서 한성부판윤이 되었고, 그 뒤 병조판서·예조판서,상호군(上護軍)

    경기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선조애책문(宣祖哀冊文

    : 선조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을 짓고 한성부판윤·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세자의 책봉을 청하는 주청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그 공로로

    숭정대부(崇政大夫)가 되었으며, 1610년에는 동지경연사·동지성균관사·예

    문관대제학을 겸대하였다.그러나 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선조로부터

     

    창대군(永昌大君)의 보필을 부탁받은 유교칠신(遺敎七臣)인 까닭에 이에 연

    되어 파직되었다. 1616년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비 및 이와 관련된 김제

    (金悌男)에의 가죄(加罪:죄를 더함)와 함께 다시 논죄된 뒤 춘천에 유배

     

    되었으며 1621년에 사면되었다.1623년(인조 즉위년) 3월 인조의 즉위와 함께

    이조판서 겸 예문관·홍문관의 대제학에 중용되었다. 같은 해 7월에 우의정에

    발탁되었으며,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좌의정으로서 세자를 수행하고

     

    전주에 피난했으며, 같은 해 9월 영의정에 올랐다가 죽었다.일찍이 부모를

    여의었으나 학문에 전념, 벼슬하기 전부터 이미 문명을 떨쳤다. 벼슬에 나가서

    는 서인인 이이와 정철을 옹호하여 동인의 배척을 받았으나, 장중하고 간결한

     

    성품과 뛰어난 문장으로 선조의 신망을 받으면서 항상 문한직(文翰職)을 겸대

    하고 대명외교문서의 제작, 시문의 정리, 각종 의례문서의 제작에 참여하는

    문운의 진흥에 크게 기여하였다.또한, 사림의 신망을 받음은 물론, 이정구(李

     

    廷龜)·장유(張維),이식(李植)과 함께 조선 중기 한문학의 정종(正宗:바른

    통) 또는 월상계택(月象谿澤 : 月沙 이정구, 象村 신흠, 谿谷 장유, 澤堂 이식

    을 일컬음)으로 칭송되었다. 묘는 경기도 광주군에 있다. 1651년(효종 2) 인조

     

    정에 배향되었고, 강원도 춘천의 도포서원(道浦書院)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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