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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백주의 시
    한 자/한시(한국) 2009. 3. 31. 23:28

    相公을 뵈은 후에 事事를 밋자오나

    拙直한 마음의 병들가 念慮려니

    이라마 뎌리챠하시니 百年 동포 하리이다

                              ~소백주(小栢舟)~

    <해설>

    상공을 뵈온 뒤에 모든 일을 전혀 믿사오나, 옹졸하고 고지식한

    마음에 병이 들까 걱정이 옵더니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하시니

    백년을 함께 살고자 하노라.


    ◈ 배경

    두암 김응남은 성암(省庵) 이지번(李之蕃)의 사위였다. 이지번의 아우가 토정비결로

    유명한 이토정이고, 아들이 또한 유명한 아계(鵞溪) 이산해(李山海)였다. 이산해는

    북인의 영수였고 유성룡은 남인의 영수였으므로, 서인이 몰리는 시대가 되었다. 때를

     

    만난 남인과 북인은 다시 들고 일어났다. 동강 김우옹이 선두에서서 오음 윤두수와

    송강 정철을 공격했다. 그러자 수몽(守夢) 덩엽(鄭曄)과 상촌 신흠이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겅엽(1563~1625)은 본관이 초계(草溪)로서 자는 시회(時晦)인데

     

    수몽은 여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들었는데 이산해의 아우 산보(山甫)의 사위가 되었

    으며 산보의 숙부 토정이 그를 보자 “장차 크게 될 사람이다”고 칭찬했다고 한다.

    상촌과 수몽은 “송강 정철과 오음 윤두수는 임진왜란에 둘다 공로는 있을지언정 죄는

     

    없습니다. 하물며 원로대신을 공격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선조대왕은 당쟁을 싫어

    했으므로 크게 노하시고 김우옹과 정엽이 다 함께 벼슬에서 쫓겨났다. 한편 이 무렵

    명나라는 심유경(沈惟敬)이란 자를 내세워 화의를 교섭하고 있었는데, 심유경이

     

    유성룡에게 말하기를 “지금 우리 명나라에서는 일본의 풍신수길을 일본왕(日本王)

    으로 봉하기로 하고 저들이 그것에 만족하여 화해를 청해오면 조선에서도 화의

    응하시오.“라고 했다. 서애는 이 말을 듣자 일이 좀 맹랑하게 되었다고 생각했으나

     

    명나라 유격장군 심유경의 말이라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우계 성혼과 함께

    선조대앙 앞에 나아가 “지금 국세가 위태롭고 급박하오니 조금 병봉(兵鋒을 늦추

    어서 우리의 힘을 기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따라서 왜국이 화친을 청해오면 들어 주사

     

    이다.“라고 아뢰었다. 우계는 서인이었다. 정철은 이미 병들어 돌아간지 오래였으므

    로 우계는 서인의 영수인 셈이었다. 이 왜국과의 화친문제를 춘호(春湖) 유영경(柳永

    慶)과 관송(觀松) 이이첨(李爾瞻)이 공격했다. 이들은 둘다 북인이었다. 성혼은 고향

     

    에 돌아가 이내 병들어 죽었으므로 남인의 영수인 유성룡에게 공격의 화살을 집중

    켰다. 이리하여 서애는 선조 32년 영의정을 내놓고 물러났는데 오음 윤두수가 영

    의정에 임명되었으므로 북인은 오히려 서인의 정권 장악에 힘을 빌려준 꼴이 되었다.

     

    소백주는 평양 기생으로서 자세한 것은 모른다. 선조 33년 의인왕후박씨(懿仁王后朴

    氏)가 승하를 하셨다. 의인왕후에겐 아드님이 없었으므로 후궁의 몸에서 난 광해군

    (光海君)이 세자(世子)로 책봉돼 있었다. 그것보다 왕후는 하루도 없어선 안 되는 것

     

    이므로 선조대왕은 늦게 장가를 들게 되었다. 이 때 맞아들인 왕비가 인목왕후(仁穆

    王后) 김씨다. 그런데 인목왕후는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낳았던 것이다. 왕후의 몸에

    서 적자가 태어나므로 세자 광헤군은 몹시 불안해 하였고 그 지위 또한 흔들리게 되

     

    었다. 그런데 이 문제를 갖고서 조신들 사이에 한바탕 논쟁이 또 벌어지게 되었다.

    “원자께서 이미 태어나셨으니 광해군은 세자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하는 주장과

    “원자께서 탄생하셨다 하더라도 광해군이 벌써 20여년이나 세자로 계셨으니 그대로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서 자못 시끄러웠다. 오음 윤두수는 몇 달 안 되어 물러가

    고 오리(梧里) 이원익이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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