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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덕형의 시
    한 자/한시(한국) 2009. 3. 25. 08:56

    달이 두렷하여 碧空에 걸려시니

    만고풍상에 떠저졈 즉하다마는

    지금히 취객을 위하여 長照金樽하노매

                     ~이덕형(李德馨;1561~1613)~

    <해설>

    달이 뚜렷하게시리 푸른 하늘에 걸렸는데 저 달은 오랜 세월을

    두고 갖은 풍상에 시달려 왔으므로 떨어질듯 싶기도 하련만,

    지금의 취한 이를 위해 술통을 비추어주고 있구나.


    ◈ 배경

    이덕형은 자는 명보(明甫)이고 호는 한음(漢陰)이다 선조 13년 20세로 문과에 급제

    하여 이항복(李恒福), 이정립(李廷立) 등과 주자학으로 이름이 높았다. 율곡의 추천

    으로 호당에서 독서하였고 이어 벼슬이 교리, 승지, 참의, 참판, 대제학에 이르렀는

     

    데 겨우 31세였다. 임란이 일어나자 주로 명나라를 왕래하며 구원병 교섭을 하였다.

    임진년 12월 명나라는 드디어 대군을 보내왔다. 이여송이 총대장으로 병력이 4 만

    남짓이었다. 선조 26년(15930 1월 명군과 송운대사의 승병 동 아군은 평양성을 포위 

     

    했다. 공격 하루 만에 왜군은 태반이 죽고 밤중에 얼은 대동강을 건너 남쪽으로 달아 

    났다. 여기에 기고만장해진 이여송은 적을 추격했는데 벽제싸움에서 왜군의 반격을 

    받아 대패하고 도로 개성으로 물러갔다. 이때 명군의 위급을 구하고 왜군에게 결정 

     

    적인 타격을 준 것이 권율(權慄)이었다. 권율91537~1599)은 자를 언진(彦鎭)이고

    호는 만취당(晩翠堂)이다. 권율이 행주산성에 진을 친 것은 명나라의 이여송과 합세

    하여 서울의 적을 격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명군이 벽제에서 대패하고 개성으로

     

    달아나자 권율의 행주산성은 고립무원의 지경에 빠졌다. 아니나다를까 왜군은 벽제

    에서 이긴 여세를 몰아 행주로 몰려왔다. 그 병력은 자그만치 3 만 남짓이나 되었다.

    때는 선조 26년 2월 12일이었다. 노도처럼 밀어닥친 적군은 기세등등 산성을 포위

     

    하고 맹렬한 공격을 했다. 그러나 성은 함락되지 않고 오히려 왜군은 수많은 장병만

    죽어 자빠졌다. 왜군은 새벽부터 무려 아홉 차례나 파상공격을 가했다. 그러나 권율

    이하 군사는 물론이고 아녀자까지 앞치마에 날라 적과 대항했다. ‘행주치마’란 말이

     

    여기서 생긴 것이다. 돌을 나르기 편하도록 치마를 짧게 만들어 앞에 차고 돌을 날랐

    던 것이다. 결국 왜군은 2만 4천이라는 전사자를 남기고 패주하였다. 권율은 이 대승

    리를 거둔 뒤 군대를 파주로 이동시켰다. 그 휘하 장병들은 왜병의 목을 수 없이 베어

     

    갖고 있었다. 명나라 이여송의 참모 여응종(呂應鍾)이 이걸 보고서 “조선 사람이 이제

    는 적의 머리를 공 쪼개듯 하는구료.”하고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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