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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충신의 시한 자/한시(한국) 2009. 3. 25. 08:49
空山이 寂寞한듸 슬피 우는 뎌 두견아
蜀國興亡이 어제 오늘 아니어든
지금히 피나게 우러 남의 애를 긋느니
~정충신(鄭忠信;1576~1636)~
<해설>
인가도 없는 적막한 산에서 쓸쓸히 우는 저 두견아 촉나라의
흥망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련만 지금도 그렇듯 피나게
울어서 이 나의 속 간장을 다 끊어 내느냐.
◈ 배경
정충신의 자는 가행(可行)이고 호는 만운(晩雲)인데 임진왜란 당시 권율은 광주
(光州) 목사로 충신은 그 밑에 일하는 통인(通引)에 지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정충신
의 조상은 고려의 장군이었는데 고려가 멸망하자 이씨조선에 벼슬하지 않고 광주에
와서 농사나 지으며 살았기 때문이다. 권율은 17세인 정충신에게 장계를 들려 멀리
의주까지 심부름을 보냈다. 적군이 우글거리는 천리길을 갖은 위험을 무릅쓰면서
무거운 임무를 달성했던 것이다.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킨 고경명은 김천일과 함께
금산(錦山)에서 왜군과 싸워 이들을 다수 죽이고 7월 10일 아들 인후(因厚)와 더불
어 장렬한 전사를 했다. 그 이듬해 진주싸움에서 김천일, 최경회(崔慶會) 등과 장렬
한 전사를 했다. 곽재우(郭再祐;1552~1617)는 본관이 형풍(玄風)으로 남명 조식에
게 글을 배웠는데 임란이 일어나자 경상도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각지에 주둔
한 왜적을 모조리 격파하여 의령, 삼가(三嘉), 초계(草溪) 등 경상 우도 각 고을의
백성들이 안심하고서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왜군들은 그를 홍의장군이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그밖에 경상도에서는 김면(金沔), 정인홍(鄭仁弘), 김해(金垓), 유종개
(柳宗介), 이대기(李大期), 장사진(張士珍) 등이 각기 의병장으로서 활약하며 적과
싸우고 전사하거나 하였다. 충청도의 의병장으로선 스님인 영규(靈圭), 조헌(趙憲)
김홍민(金弘敏), 이산겸(李山謙), 박춘무(朴春茂), 조덕공(趙德恭), 조웅(趙雄), 이봉
(李逢) 등이 있었다. 조헌(1544~1592)은 관향이 백천으로서 자는 여식(汝式)이고
호는 중봉(重峰)이다. 명종 22년 문과에 급제하고 교서관(校書館)에 속하며 정주
교수로 3년이나 있었다. 말하자면 불우했던 셈이다. 그 뒤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
와서 전적, 통진 현감을 지냈는데 벼슬길에서 물러나 귀양을 갔고 다시 복직되어
공조좌랑 등과 청주에0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그가 거느린 옥천의 문하 유생 7백은
영규대사의 의병과 합력하여 금산에서 싸웠다. 조헌은 이 싸움에서 장렬한 전사를
하였으며 7백의 문하 유생 역시 한 사람도 달아나지 않고 여기서 준절하였다.
경기도의 의병장으로서는 우성전(禹性傳), 정숙하(鄭叔夏), 최흘(崔屹), 남언경(南
彦經), 홍계남(洪季男) 등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홍계남은 서자로서 신분적 차별
을 받는 처지였으나 임란이 일어나자 아버지 언수(彦秀)와 함께 수원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적을 무찔렸는데 그 공으로 수원 판관(判官)이 되었다. 홍계
남은 특히 용력이 뛰어나 이르는 곳마다 적을 무찌르고 적장을 백여 명이나 베어
죽였으며 다시 경기 조방장이 되었다. 그가 마침 다른 곳에 간 사이 아버지가 전사
하였는데 그 소식을 듣자 계남은 비호같이 달려 돌아와 그길로 적진 속에 뛰어들어
왼 팔로 아버지의 시체를 안고 오른 손으로 칼을 휘둘러 몇 명의 적을 거꾸려뜨렸
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