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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광조의 시
    한 자/한시(한국) 2009. 3. 21. 17:29

    꿈에 曾子께 뵈와 事親道을 뭇자온듸

    曾子曰 嗚呼라 小子야 드러서라

    事親이 豈有他哉리오 敬之而已라 하시더라

                             ~조광조(趙光祖;1482~1519)

    <해설>

    꿈에 증자를 뵙고서 어버이는 모시는 도리를 물었더니 증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오 이사람 그것도 모르나? 들어 보게나 어버이를

    받드는 일이 별다른 것이 있겠는가. 오직 공경하면 되는 것이리라.


    ◈ 배경

    중종이 즉위하자 부인이었던 신씨는 쫓겨나고 새로이 왕비를 맞게 되었다. 이리하여

    윤여필(尹汝弼)의 딸이 간택이 되었는데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이다. 윤임(尹任)은

    장경왕후의 동생으로서 자는 성임(聖任)이었고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조광조는 본관이 한양이고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이다. 그는

    17세 때 아버지가 어천(魚川) 찰방으로 있을 때 이웃 고을인 희천에 때마침 무오사화

    로 귀양와 있는 한휜당 , 김굉필을 알게 되고 그에게서 배웠다. 그 뒤 중종 5년 알성시

     

    에 장원하여 벼슬길에 나섰는데 평소부터 꿈꾸던 이상적인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실현코자 션량과(賢良科)를 두기를 왕께 상신했다. 글자 그대로 인재를 뽑기 위한

    시럼제도다. 또 그는 향약(鄕約)을 만들어 이웃끼리 돕는 인보정신(隣保精神)과

     

    자치를 하게 하는 도덕정치를 감행하여 임금의 신임을 받았다. 그리고 공신의 자제

    로서 지체만 높은 것을 자랑하려는 훈구파의 세력 세력을 꺾어려 하였다. 그러난

    중종 14년 당시의 기성 정치인 남곤(南袞;1471~1527), 심정(沈貞) 등의 무고를 받아

     

    또 한 번 큰 의혹이 일어났다. 남곤은 자를 사화(士華)라 하고 호는 지정(止亭)인데

    김종직의 문하에서 배웠다. 성종 20년 생원, 진사에 오르고 동 25년 문과에 급제하여

    그 문명(文名)이 크게 떨쳤고 부제학, 좌부승지 등을 역임했다. 이어 간신 유자광의

     

    당이 되어 이조판서, 대제학이 되는 등 그 출세가 빨랐다. 그리고 중종 때에 들어와

    서는 좌우 정승을 거쳐 영의정까지 올랐는데 대사헌인 조광조와는 의견 충돌을 일으

    키고 사이가 바빴다. 한편 심정(沈貞;1471~1532)은 본관이 풍산(豊山)으로서 자는

     

    정지(貞之), 호는 소요정(逍遙亭) 인데 중종반정에 공이 있어 공신이 되었다. 이 두

    사람이 조광조를 모함했던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기묘사화(己卯士禍) 인데 당시의

    형조판서 김정(金淨)은 금산에, 부제학인 김구(金絿)는 개녕(開寧)에, 대사성 김식

     

    (金湜)은 선산에, 승지 박세희(朴世喜)는 상주에, 승지 박훈(朴薰)은 성주에, 응교

    기준(奇遵)은 평산에, 윤자임(尹自任)은 온양에 각각 귀양을 갔다. 조광조는 능주

    (綾州)로 유배되었는데 결국 약사발이 내려져 “인금님을 사랑하기를 아버지와 같이

     

    하고 나라를 위하여 내 집과 같이 힘썼네, 밝은 햇님 아래 땅속으로 가게 되니 붉은

    마음을 비추어 주소서(愛君如愛父 爲國如爲家 白日臨下地 昭昭昭丹哀)“이란 오언

    절구의 시를 남기고서 태연히 독약을 마셨다. 이때가 향년 38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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