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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 이방원, 정몽주 모당의 시한 자/한시(한국) 2009. 3. 14. 21:07
碧海竭流後의 모래 모혀 셤이되야
無情 芳草는 해마다 푸르로되
엇더타 우리의 왕손은 귀불귀를 하느니
<해설>
푸른 바닷물이 다 말라버린 뒤에 모래가 모여 섬이 되고
속절없는 풀과 꽃은 해마다 다시 그 철이 되면 푸르러지는데
어떤 일로 우리의 왕손만은 한 번 가고는 다시 오지를 못하는가?
이몸이 주거주거 일백 번 고쳐 주거
백골이 진토되야 넉시라도 잇고 업고
님 향한 일편 단심이야 가실 줄이 이시랴
<해설>
이 몸이 죽고 또 죽고 일백 번 다시 죽어서 살은 썩고 백골마저
흙이 되어 넋이야 있건 없건 임에게 이미 바친 이내 단심이야
변할 리가 있으랴
~정몽주(1337~1392)~
이런들 엇더하며 저런들 엇더하리
萬壽山 드렁츩이 얼거딘들 긔 엇더리
우리도 이가치 얼거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해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왕씨를 섬기다 또 이씨를 섬긴들
어떠하리? 저 만수산의 드렁칡이 뒤엉클어진들 그 어떠하리? 왕씨니
이씨니 할것 없이 그대로 어울러져서 산들 어떠하리? 우리들도 이와
같이 어울러져서 한 백 년 살 수 있는 날까지 사는 것이 어떠하리오?
~이방원~
가마귀 싸호는 골에 백로야 가디 마라
성낸 가마귀 흰비츨 새오나니
창파에 조히 씨슨 몸 더러일가 하노라.
<해설>
까마귀들 끼리 싸우는데 백로야 너는 부디 가지마라, 성낸 까마귀가
너의 흰빛을 보고 몹시 시기하여 미워할 것이니, 푸른 물결에 깨끗이
씻은 네 몸을 혹시나 더럽힐까 걱정되는구나.
~ 정몽주 모당~
◈ 배경
고려의 제29대 충목왕(忠穆王;1337~1348)은 1344년에 즉위하였으므로 불과 4년
이고 그 다음 제30대 충정왕(忠定)도 불과 재위 3년이었다. 이어서 제31대 공민왕
(恭愍王)은 충숙왕의 둘째 아들로서 1341년 충혜왕 복위 2년에 원나라로 들어갔다.
그리고 노국대장공주를 비로 맞아 원나라 조정의 지시로 충정왕을 폐하고 왕위에
올랐다. 이때 원나라는 이미 멸망의 길을 향해 줄달음질치고 있었다. 왕이 가장 신임
했던 사람은 최영과 유탁이었다. 최영(1316~1388)은 창원(昌原) 최씨로 평장사 유청
의 5대손이고 사헌규정(司憲糾正) 원직의 아들로서 유명한 “황금보기를 흙덩이 보듯
하여라”하는 가훈 아래 소년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일찍부터 군문에 몸을 던져 양광
도(楊廣道) 도순문사(都巡問使) 막하에 있었다. 한편 유탁(1311~13710은 고흥(高興)
유씨로서 고흥부원군 청신의 손자였다. 그는 담략이 있고 무예가 뛰어나서 일찍부터
원나라에 들어가 왕을 호위하는 소임을 맡았고, 돌아오자 찬성사(贊成事)라는 벼슬에
있었다. 최영보다 연장자일 뿐 아니라 지위도 높았다. 공민왕 원년(1352) 왕은 원나라
가 쇠약했음을 알고 몽고의 풍습인 변발(辨髮), 호복(胡服)을 금지했고 동 5년에는
몽고의 연호, 관제를 폐지했을 뿐 아니라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던 정동행중서성이문
소(征東行中書省理問所)를 없애버렸다. 공민왕 5년 비로소 역사에 이성계가 등장한다.
성계는 충숙왕 복위 4년(1355) 자춘의 아들로 영흥에서 태어났다. 자는 중결(仲潔),
호는 송헌(松軒)이다. 공민왕은 이 때 장군 유인우를 시켜 몽고의 쌍성총관부(雙成總
管府)를 소복코자 했다. 그러나 성이 봄처럼 함락되지 않아 애먹고 있었을 때 이자춘
부자의 도움을 얻어 화등, 장정, 장령, 고문, 선주, 덕원, 흥영, 인요, 덕정 등지를 수복
했는데 이 자방은 실로 99년 만에 고려의 판도로 되돌아왔던 것이다. 이보다 앞서 공
민왕 원년 9월초 조일신이 난을 일으켰다. 조일신은 공민왕을 호종한 공로로 찬성사가
되고 공 일등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욕심이 많은 그는 정천기와 같은 무리와 음모
를 꾸며 당시의 권신 기철형제 등을 제거하려 했다. 고려인으로서 원나라 황제의
후궁에 들어간 사람이 적지 않았으나 기철의 누이는 원나라 마지막 황제인 순제의
황후가 되었고 황자까지 낳았던 것이다. 이리하여 조일신은 기씨네의 재물을 탐내고
밤중에 군사를 일으켜 습격했는데 기철의 아우 기원만 죽이고 나머지는 도망을 쳤다.
조일신 등 역도들은 성입동 별궁에 있는 왕을 협박하고 숙직무사 등을 죽였으며 일신
은 우정승, 천기는 좌정승이 되어 정권을 잡았다. 이때 최영은 왕의 밀명으로 안우,
최원 등과 더불어 역도를 소탕하고 단번에 호군이 되었다. 공민왕 3년 중국 산동의
고우(高郵)에서 장자성이란 자가 반란을 일으키자 최영은 원나라의 요청으로 유탁,
염제신 등과 원정하여 그들을 전멸시켰고 용맹을 중국 대륙에 떨쳤다. 공민왕 9년
안유(安裕)는 맹장이었는데 안주(安州)의 만호(萬戶)가 되었다. 이 때 홍건적이 벌떼
처럼 몰려와 의주, 철주, 정주(靜州), 정주(定州)를 침입했다. 안유는 김득배, 이방실
등과 홍건적을 크게 파했고 동년 10월 홍건적이 20만의 대군으로써 압록강을 건너자
안유는 큰 승리를 걷지 못하였다. 홍건적은 원나라가 쇠망하자 중국에서 봉기한 도둑
들로서 머리에 붉은 수건을 두르고 있어 이런 이름이 생긴 것이다. 홍건적은 마침내
개성을 짓밟고 왕은 멀리 복주(福州=安東)까지 피난했다. 최영은 이때 이성계, 정세
운, 안유, 김득배 등과 협력하여 이들을 무찔렀다. 그러나 언제고 간신은 있는 모양
이다. 김용이라는 자가 있었다. 이 사람은 성격이 음흉하고 시기심이 많았다. 공민왕
10년 홍건적이 개경을 점거했을 때 정세윤이 총병관으로써 안유, 김득배, 이방실
등과 더불어 이들을 섬멸하였다. 김용은 이들의 대공을 시기하고 중용될 것을 두려워
하여 왕명이라 거짓 칭하고서 안유 등을 시켜 정세윤을 죽이게 하였다. 그런 뒤 정세
윤을 죽인 죄를 물어 이번에는 안유 등 맹장을 모조리 죽였다. 이보다 앞서 최영은
공민왕 7년 양광, 전라도 왜적체복사(倭賊體覆使)가 되어 장연(長淵)의 오예포에
침입한 왜구의 배 4백 여척을 무찌르는 전공을 세웠다. 한편 공민왕 12년 3월 김용은
그의 일당 김수와 조운 등과 반역심을 품고서 임금의 흥왕사 별궁을 습격했다.
왕은 간신히 몸을 피했고 유탁과 최영이 이들 김용의 무리들을 주살했던 것이다.
정몽주는 연일(延日) 정씨로서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이다. 그는 공민왕
9년 22세 때 삼장(三場)에 연괴(連魁)하여 예문관 검열이 되었으며 청년 선비로서
사람들의 덕망을 한 몸에 모으고 있었던 것이다. 이어 수찬(修撰) 등을 거쳐 1363년
에는 이성계의 낭장이 되어 여진족을 토벌하는데 참가하였고 따라서 이성계와도
친한 사이였다. 또 1364년에는 예조정랑 겸 성균박사가 되었고 1372년에는 명나라에
갔다 오다가 풍랑을 만나 배가 파선되고 구사일생으로 구출되었다. 그리고 우왕
2년(1376) 이인임과 충돌하여 언양(彦陽) 으로 귀양을 갔었고 결국은 선죽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