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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재의 시
    한 자/한시(한국) 2009. 3. 14. 22:05

    五百年 都邑地를 匹馬로 도라드니

    山川은 依舊하되 人傑은 간데없네

    어즈버 太平煙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길재(吉再;1353~1419)~

    <해설>

    고려 오백년의 서울이었던 땅을 다만 한 필의 말에 몸을 싣고 들어오니,

    산천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건만 인걸은 다 죽어 보이지 않는구나,

    아아 태평하던 그 시대가 한바탕 꿈인 듯 너무너무 속절없구나.


    ◈ 배경

    공민왕이 시역되자 이인임과 경부흥이 최만생 등을 잡아 죽였다. 이인임은 이조년

    손자로서 강녕군 우(禑)를 왕으로 만들었다. 우왕으로서 신돈의 자식이라는 소문이

    있었고 이인임이 그를 양육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인임은 우왕 밑에서 시중이

     

    되었고 정권을 저 혼자서 주물렀다. 특히 인임은 이미 멸망한 원나라의 잔당과 손을

    잡고 친명파(親明派)인 정몽주를 조정에서 내쫓았다. 이 무렵 최영은 우왕 2년 역사

    상 유명한 홍산 싸움에서 왜구를 크게 무찔러 철원부원군이 되었고 이때부터 왜구는

     

    최영장군을 백수(白首) 최만호라 하여 이름만 들어도 겁을 먹고 달아났다. 다시 우왕

    4년 왜구가 풍덕까지 쳐들어와 개경이 위태롭자 이성계, 양백연 등과 힘을 합하여

    적을 쳐서 섬멸하여 안사공신(安社功臣)의 칭호를 받았다. 이 무렵 우왕의 요구로

     

    딸을 왕비로 들여보냈다. 우왕 14년(1388), 명나라가 철령(鐵嶺) 이북의 땅을 자기네

    땅이라고 반환을 요구해왔다. 원나라 시절 철령위라는 것을 두어 고려의 판도 밖에

    잠시 있었던 건 사실이나 명나라가 그걸 요구한다는건 언어도단이었다. 최영은 이리

     

    하여 요동정벌을 강력히 주장하였고 스스로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되어 그 밑에

    좌군도통사 조민수, 우군도통사 이성계를 거느렸다. 그런데 성계와 민수는 압록강변

    위화도(威化島)까지 가자 상관인 최영의 독촉에도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진격하지를

     

    않았다. 그리고 이성계는 조민수와 공모하고서 군을 돌렸는데 이것이 곧 ‘위화도

    회군’이다. 군을 돌리자 성계와 그 아들 이방원은 번개처럼 행동을 개시, 최영을 체포,

    고양군으로 귀양 보냈다가 다시 충주로 옮기고 끝내는 목을 베어 죽였던 것이다.

     

    이 때 최영의 나이 73세로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송도 사람들은 일반 서민이나 어린

    이에 이르기까지 눈물을 흘렸고 철시(撤市)를 했다고 한다. 길재는 해평(海平) 길씨

    로 자는 재부(再父), 호는 야은(冶隱), 선산(善山) 봉계(鳳溪) 태생으로 24세 때 문과

     

    에 급제하여 문화주서(門下注書)까지 이르렀으나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렸다.

    본디 방원과는 동학(同學)한 사이라 정종(定宗)이 즉위한 뒤 방원이 태자로 있을 때

    태상박사(太常博士)로 불렀는데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하고 거절했다.

     

    길재는 또한 효도로서 유명하여 가히 충효의 양도를 겸비했다고 하겠다. 그의 학문은

    포은의 뒤를 이어 강호(江湖) 김숙자(金淑滋)에 전해졌고, 숙자는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에게, 종직은 한휜당(寒휜堂) 김굉필(金宏弼)에게, 굉필은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에게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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