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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영의 시
    한 자/한시(한국) 2009. 3. 14. 08:23

    錄耳箱蹄 살지게 먹여 시냇물에 싯겨타고

    龍泉雪鍔을 들게 가라 두러메고

    장부의 위국 충절을 세워 볼까 하노라

                              ~최영(崔瑩;1316~1388)~

    <해설>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는 이름난 말 녹이나 상제 같은 말을 살찌게 먹여서

    더욱 기운 내게 하고 시냇물에 잘 씻겨 타고 용천의 서릿발 같은 칼날을

    더욱 잘 들게 갈아 둘러메고 이 남아의 나라위하는 충절을 빛내고 싶다.


    ◈ 배경

    고려 제24대 원종부터 제31대인 공민왕에 이르기까지의 약 백 년 동안은

    우리 민족에게 있어 일대 수난기였다. 원종 14년 김방경이 제주도에서

    삼별초의 잔당을 완전 토벌했다. 김방경은 자를 본연(本然)이라 하였는데

     

    안동(安東) 김씨이다. 그는 고종 때 등과하여 서북면 병마판관으로 있을 때

    몽고군이 침입하자 백성들을 데리고 위도(葦島)로 들어갔다. 그 섬에 사방

    십리나 되는 평야가 있었건만 바닷물이 드나들어 아무 쓸모가 없었다.

     

    그는 이곳에 둑을 쌓아 바닷물의 침입을 막고 또한 저수지를 만들게 하여

    농사를 짓게 하였으므로 몽고군의 횡행 속에서도 이곳만은 안전했다.

    벼슬이 올라 형부상서, 추밀부사(樞密副使)가 되었는데 임연(林衍)이 왕을

     

    폐하려 하자 원나라에 있던 세자(충렬)는 원나라에 청병(請兵)을 했는데.

    이때 김방경은 세자에게 말하기를 “원병이 강을 건너면 처벌한다는 원나라

    황제의 조서를 받자“고 주장하여 국가의 위기를 면했다. 삼별초의 난이 일어

     

    나자 방경은 원병과 더불어 진도와 제주도를 토평(討平)했는데 이때도 적의

    적의 괴수만 처단했을 뿐 백성들은 불문에 붙이도록 했다. 원종 15년 몽고군

    더불어 일본을 공격했으나 태풍으로 함대가 침몰하여 실패하였다. 원종이

     

    재위 15년으로 승하하자 세자가 왕위에 올랐고 충렬왕(忠烈王;1236~1308)이

    되었다. 충렬왕은 원나라에 볼모로 가 있을 때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의 딸

    재국대장공주(齋國大長公主)를 아내로 맞이하였고 국민에게 원나라 풍속을

     

    따르도록 했다.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침실에서‘요강’사용도 그 몽고 풍속의

    하나라고 한다. 그리고 두 번째로 김방경을 시켜 일본 원정을 꾀했으나 이번

    에도 태풍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당시 고려에는 대제국 원나라의 그늘 밑

     

    에서 어떻게 하면 국가와 민족을 유지하느냐 였었다. 원나라가 고려의 국토

    이상을 자기네 직할지로 삼고 세자를 볼모로 삼았을 뿐 아니라 독로화(禿

    魯花=유학생)라는 이름으로 다수의 귀족이나 명신의 자제들을 원나라로 데려

     

    갔던 것이었다. 김문연(金文衍)은 고려 명장 김취려의 손자로서 일찍이 승려의

    이었으나 누이동생이 충렬왕의 총애를 받아 숙창원비가 되자 그도 환속하여

    밀직사(密直使)라는 직위에 올랐다. 충렬왕 24년(1298), 왕은 왕위를 세자인

     

    충선왕(忠宣王;1275~1325)에게 물려주었다. 충선왕은 충렬왕의 장자로서 어

    머니는 재국대장공주였다. 충선의 왕위 계승은 충렬왕이 이미 늙었다는 구실

    도 있었으나 재국대장공주가 24년에 죽었으므로 왕위를 충선에 넘겨주고 원

     

    나라 조정에 소환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충선에게는 보탑실린(寶塔實燐)이라는

    몽고공주가 왕비로 따라왔다. 이 보탑실린이 문약(文弱)한 충선을 찍어 누르고

    안하무인이었다. 더구나 보탑실린은 왕족인 서흥후 전(琠)에게 추파를 던지고

     

    그를 유혹고자 했다. 이리하여 충선은 1년도 못되어 다시 원나라에 소환되고

    충렬이 복위하게 되었지만 두 왕의 신하가 서로 대립하게 되고 싸웠다.

    특히 왕유소, 송방영 같은 간신의 무리들이 보탑실린 공주와 부동이 되어 충선을

     

    모함했으므로 충렬왕도 간신의 말에 귀를 기울여 서흥후 전을 세자로 삼고

    보탑실린을 그에게 개가시키려고 했다. 이 때 홍자번, 최유엄, 김문연 등이

    원나라 중서성에 나아가 왕유소 등의 죄상을 통렬히 비난했다. 그러나 충렬

     

    왕은 오히려 귀 기울이지 않았고 보탑실린 공주는 대노하여 그들을 불러다

    매질을 하는 등 포악을 부렸다. 충선왕의 위치가 그야말로 바람 앞의 촛불

    같은 형세였다. 이 때 김이(金怡;1265~1327)라는 사람이 충선을 모시고 있다

     

    가 항상 불의의 변을 당할까 염려하여 충선이 원나라 황제한테 받은 조서를

    줄곧 몸에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간신들이 충선을 해하려고 할적마다 그 원

    나라 황제의 조서를 방패삼아 충선을 지켰다. 하루는 간신들이 충선을 찾아와

     

    “본국의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는 세조 황제(쿠빌라이)께서 이품 관직으로

    정하시고 인(印)까지 내리셨으니 그 관직을 받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몽고의

    대신들도 감히 업신여기지 못할 겁니다.“워낙 구박이 심해 마음이 약해

     

    있었던 충선이니 만큼 솔깃하여 그 말을 따르려고 했다. 이 소식을 듣고

    안 됩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정령(政令)이 원나라에서 나오게 되고 마침내

    우리나라를 합병할 것입니다. 하고 김이와 더불어 결사적으로 막았다. 때마침

     

    원나라에 정변(政變)이 일어나고 충렬왕이 재위 34년 만에 승하하자 형세는

    역전되었다. 충선은 1308년 다시 복위하고 귀국했다. 그리고서 오랫동안

    고락을 같이 한 홍자볌, 최유엄, 김문연, 김이 등을 중용(重用)했는데 충선

     

    이 선왕의 총비였던 문연의 누이 숙창원비와 불륜의 관계를 맺었던 것이고

    우탁이 이것을 강력하게 간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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