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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색의 시
    한 자/한시(한국) 2009. 3. 14. 11:18

    백설이 자자딘 골의 구름이 머흐레라

    반가운 매화는 어늬 곳의 피였는고

    석양의 홀노 셔이셔 갈곳 몰라 하노라

                         ~이색(李穡;1328~1399)

    <해설>

    흰 눈이 녹아 없어진 골짜기에 구름이 또한 험악하게 일어나는 구나.

    꽃 중에 열녀라고 하는 보기에도 반가운 매화꽃은 어느 곳에 피었을까?

    다 기울어진 날에 혼자 서 있어 갈 곳을 찾지 못하고 있구나.


    ◈ 배경

    고려의 제27대 충숙왕(忠肅王)은 충선왕의 제2왕자로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왕위에 오르긴 했으나 그 지위가 확고하지 못했다. 원나라에서 심왕

    (瀋王) 숭(嵩)을 왕위에 앉히고자 하였으며 간신들이 또한 날뛰었기 때문이다.

     

    김륜은 언양 사람으로 자를 무기(無己)라 하고 호를 죽헌(竹軒)이라 하였는데

    역시 김취려의 손자였다. 따라서 앞서 나온 김문연과는 사촌인 셈이다.

    충렬왕 16년(1290) 합단(哈丹=원 태종의 둘째아들과 그 일파)이 침입하자 도성

     

    사람들이 모두 강화로 난리를 피했는데, 이때 14세인 그는 일족을 지휘하며

    피난의 큰일을 해내었다. 충숙왕이 원나라에 억류되었을 때 김륜은 왕의 곁에서

    떠나지를 않았으며, 심왕 숭의 무리들이 “모든 사람이 심왕을 받들겠다, 하니

     

    공의 형제도 서명하시오“라고 졸라댔다. 끝내 서명을 거절하자 간신들은 다시

    “뭇사람들의 뜻을 어기면 뒤에 후회가 있으리라”하고 꾀였다. 그러나 김륜은

    “두 마음을 갖지 않음이 신하의 직분인데 무슨 후회가 있으랴!”하고 끝가지

     

    버티었다고 한다. 간신들은 숭의 추대가 여의치 않자 이번에는 “고려를 성(省)

    으로 만듦이 어떻습니까?“하고 원나라 조정에 말했다. 이 때문에 원나라에선

    조사관까지 파견했으나 김이, 김륜, 최성지, 이제현 등이 원나라 도당(都堂)에

     

    글을 올려 그 부당함을 극력 주장했던 것이다. 최성지(1265~1330)는 전주사람

    으로 자를 순부(純夫)라 했고 호는 송파(松坡)이다. 그는 천성이 강직하고 쓸데

    없는 말을 일체 하지 않았으며 글씨와 시문에 능통했는데, 충선왕이 원경에

     

    있을 때 역수(歷數=천문학)에 관심을 두고 그것을 배워 갖고 돌아온 사람이다.

    이제현(1287~1367)은 경주 이 씨로 자를 중사(仲思)로 했고 호는 익제(益濟)

    인데 성리학자이다. 안유(安裕)의 문화생으로서 충렬왕 27년 15대로 성균시

     

    (成均試)에 장원하고 예문춘추관에 들어가 성균악정(成均樂正)에 올랐다.

    그리고 원나라에 들어가 그 곳의 대학자들과 교유(交遊)했으며 뒷날인 공민왕

    때는 문하시중이 되어 배불론(排佛論)을 주장하기도 했다. 어쨌든 고려의 나라

     

    이름을 폐하고 원나라의 성을 두어 그들의 행정구역을 만들자는 안은 이리하여

    좌절된 것이었다. 충숙왕도 이와 같은 사태를 염려하여 동왕 17년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으나 2년도 못되어 다시 복위하여 전 17년, 후 8년, 도합 25년의

     

    재위 끝에 세상을 떠났다. 그 뒤르 이은 총혜왕(忠惠王)은 재위 전후 7년이었으나

    치적(治積)에 볼만한 것이 없고 음학(淫虐)을 일삼았을 뿐이었다. 이 무렵의 사람

    으로서 기억할 만한 사람은 이승휴(李承休)이다. 승휴는 일직 부모를 여의고 무척

     

    외로운 몸이었으나 고종 때 등과하였다. 그러나 때마침 전란 중이라 두타산에

    들어가 농사일을 10년이나 하였다. 그 뒤 원종 때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원나라

    에 들어갔고 충렬왕 때 우사간(右司諫)으로 장리를 탄핵하고 그 가산을 적몰한

     

    일로 벼슬을 그만 두었다. 이때 불경을 애독하고 제왕운기(帝王韻記), 내전록(內

    典錄) 등을 저술했다. 이색(李穡;1328~1399)은 한산(韓山) 이씨로 자는 영숙(潁淑)

    이고 호는 목은(牧隱)이다. 공민왕 때의 대학지이고 성리학자의 선구자다. 익재

     

    이제현의 문하에서 배웠고 14세 때 성균시에 장원하고 공민왕 3년 원나라에 들어가

    그곳 과거에서도 장원한 수재였다. 원나라 벼슬로 국사원 편수관이 되어 귀국하였고

    예문관 지제고(知制誥) 및 춘추관 편수관으로 정당문학이 되기도 했다. 공민왕 16년

     

    에는 대학장의 자리에 앉아 여러 교관들과 더불어 성리학을 강의하였으며 배불론을

    주장했다. 당대의 문장으로 유명한 포은(圃隱) 정몽주, 도은(陶隱) 이숭인과 더불어

    ‘삼은‘이라 일컬어졌으며 동국(東國)의 몬장은 목은이 제일이라고 하였다. 이성계가

     

    정권을 빼앗고 고려의 명신을 배에 태우고서 여강(驪江) 연자탄(燕子灘)에서 죽일 때

    향년 69세로 순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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