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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년의 시한 자/한시(한국) 2009. 3. 14. 00:26
리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재
一枝春心을 子規야 아랴마는
다정도 병인 양하야 잠못드러 하노라
~ 이조년(李兆年;1269~1342)~
<해설>
휘영청 밝기만 한 달빛에 배꽃은 더욱 하얗기만 한데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니 은하수가
엇비스듬하니 걸려있어 한밤중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배꽃 한 가지에 어린 봄의 마음을
너 두견새는 알고 있을 테지만, 다정도 병인 듯 잠이 좀처럼 오지 않는구나.
◈ 배경
고려의 제23대인 고종의 40년에 걸친 몽고에 대한 항쟁은 우리나라 역사상 전무후무한 국난임과
동시에 끝까지 싸운 민족의 자랑이었다. 그 항전을 이끌은 최이는 고종 36년(1249)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그 뒤를 이은 것이 최이의 아들 최항이었다. 최항은 유명을 만전이라 하였는데 최이의 서자였다.
형이 있었기에 승려가 되고자 쌍봉사에 보내졌는데 환속하여 항이라고 이름을 고쳤던 것이다.
아버지가 죽자 병부상서에 동서북면 병마사를 겸했고 고종 40년에는 문하시중이 되어 전권을 장악했다.
그런데 최항은 성품이 잔학하여 반대파를 다수 죽였고 계모와도 불화하여 그녀의 일족을 멸하는 폭거를
저질렀다. 그러나 한편 고종 42년 아버지가 떠났는데 득병하자 후원의 작은 정자에 올라 읊었다는
시 한 수가 전한다.
桃花香裏幾千家
그윽한 도화꽃 향기는 수천 집에서 풍겨오고
錦幄氤氳十里斜
씩씩한 기운이 감도는 비단 장막은 비스듬히 십리에 걸쳐 늘어서 있건만
無賴狂風吹好事
일이 일어남을 좋아하는 버릇없고 미치광이 같은 바람이 불어
亂驅紅雨過長江
장강을 지나듯 난리 속에서 비린내 나는 피를 뒤집어쓰고 말을 달렸구나.
이 최항의 후계자로 최의가 섰다. 최의는 용모가 아름답고 그 성격도 말수가 적고 수줍어하는 등
무장답지 않았다 이리하여 김인준, 유경 등이 야별초를 동원 최의 일족을 몰살시켰으며 충헌부터
내려온 최씨 60년의 권세는 막을 내렸다. 고종 45년 일이었다. 이 무렵부터 장기 항전에 지친 고려는
몽고군, 즉 원나라와 화친을 맺고 태자를 볼모로 보냈다. 그러자 고종 46년 왕이 승하하였으므로
태자 는 돌아와 제24대 원종(元宗;1219~1274)이 되었다. 한편 최의를 죽인 김인준은 본디 그의 아버지
윤성이 최충헌의 종으로써 그를 낳았다고 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용모가 호걸스럽고 성격이 너그러웠으며
활쏘기를 잘해서 송유길의 추천을 받아 최의의 어전승지가 되었다. 그러나 최의가 몹시 방자하고 백성의
재물을 약탈하는 등 전횡이 심했으므로 마침내 군을 일으켜 최의를 잡아 죽였다. 김인준은 최의를 죽이고
왕정을 회복하자 최씨집의 곡간을 헐어 그 곡식을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고 경상, 전라도에 사람을 보내어
최씨의 노비, 전답, 장원들을 죄다 압수했다. 이 공으로 장군이 되고 원종 4년에는 태자소사(太子小師)가
되는 등 실질적인 독재자가 되었다. 다시 원종 6년 시중(侍中)이 되자 차츰 최충헌의 본을 떠 사병을 두고
백성의 재물을 노략질했다. 이에 왕명을 받은 임연, 강윤소등이 밀모하여 왕이 병드셨다 거짓으로 꾸미고서
궁중에 불러들여 그 일당을 주살했다. 임연은 김인준이 그 무용을 추천하여 낭장(郎將)이 된 사람으로서
김인준과 더불어 최의를 칠 때에도 가담했었다. 그러다가 원종 9년 김인준을 쳤던 것인데 그는 다시 왕이
신임하는 장계열, 기온 등을 유배 보냈는가 하면 이듬해 인 10년에는 왕을 별실에 감금하였다. 원종이
원나라에 대한 친화정책을 쓰고 천연의 요새인 강화도를 나가 개경으로 돌아가려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임연은 왕을 폐하고 왕제(王第)인 안경공(安慶公) 창(淐)을 세웠다. 그러자 원나라 사신이 와서 강경하게
항의하는 바람에 임연은 눈물을 머금고 다시 원종을 복위시켰으며 이듬해인 11년(1270) 홧병이 도져 죽고
말았다. 원종은 11년 마침내 단안을 내려 개성으로 천도하였는데 이 때 불만을 품은 삼별초(三別抄)가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삼별초는 몽고군과 대항하여 싸운 막강한 군대로서 배중손이 그 총 지휘자가 되었다.
원종 11년6월 개경에의 천도가 결정되자 중손은 그의 동료인 노영희와 함께 이를 반대했다. 원종이 천도를
강행하자 그는 왕족인 승화후(承化侯) 온(溫)을 왕으로 추대하여 관서를 설치하고 관리를 임명하는 등 엄연한
정부를 구성했다. 그러나 강화는 개성과 너무 가까울 뿐 아니라 섬 안에 있는 문무관들 가운데 탈출하려는 자가
적지 않았으므로 중손은 병선 수 백 척을 마련하여 공사 재물과 부녀자를 싣고 멀리 진도로 그 근거지를 옮겼다.
그리고 끝까지 침략자 몽고군과 싸웠으나 이듬해 고려의 장군 김방경에게 대패하자 잔당을 이끌고 제주도로
건너갔으며 성을 두 개 쌓고 끝까지 항쟁을 계속했지만 원종 14년 남은 70여 명과 함께 산중에 들어가 목을 메어
즉었다. 이조년은 우탁보다 조금 후의 사람으로서 부리(府吏) 장경의 아들로 1269년에 태어났다. 성산(星山)
이씨로서 자는 원로(元老), 호는 백화헌(白花軒)이었다. 이조년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힘써 공부하였고
문장이 뛰어났다. 벼슬길에 올라 비서랑(秘書郞)으로 있을 충렬왕 32년 왕을 모시고 원나라에 들어갔는데 왕유소
등이 왕의 부자를 이간하는 소동에 휩쓸려 귀양을 갔고 고국에 돌아와서도 13년 동안 야에서 보내는 등 불우한
세월은 보냈다. 그 뒤 충숙왕 5년에 심왕(瀋王) 숭(崇)이 충숙왕을 무고하였는데 그는 감연히 원나라에 들어가
왕을 옹호하였다. 이렇듯 그는 강직하고 사리에 밝은 사람으로서 유명했는데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
예문관, 대제학 등까지 올라갔으며 1343년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