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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탁의 시
    한 자/한시(한국) 2009. 3. 13. 22:08

    春山의 눈 녹인 바람 건듯 부러 간데없다.

    젹은 덧 비러다가 불니코져 마라 우회 귀 밋회

    해묵은 서리를 녹여볼까 하노라.

                                    

    <해설>

    봄 산에 쌓인 눈을 다 녹인, 그 바람이 건들건들 잠간 불고는

    간 곳을 모르겠다. 잠깐 그 바람을 빌려다가 희끗희끗한 나의

    귀 밑 살쩍을 눈 녹여 주듯 다시 젊어 겼으면 좋겠다.


    한 손에 가시를 들고 또 한 손에 막대 들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白髮 막대로 치랴트니

    白髮이 제 몬져 알고 즈름길로 오더라.

                                       

    <해설>

    한 손에는 가시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몽둥이를 들고 늙어가는 것을

    가시나무로 막고 찾아오는 흰 머리를 몽둥이로 막아내어 영원한 젊음을

    누리고자 하였는데, 흰 머리가 먼저 알아차리고 가시덤불도 몽둥이도

    미치지 않는 지름길로 찾아와서 어느덧 흰 머리가 생겼구나.

                                                                ~ 우 탁(禹倬;1262~1342) ~

    ◈ 배경

    고려 11대 문종(1019~1083)은 현종(顯宗)의 제3왕자로서 성군이다. 문종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장성하자

    학문을 즐기고 기사(騎射)에도 뛰어났는데 즉위하자 최충과 같은 어진 이를 등용하여 인정을 베풀었고 특히

    문치(文治)에 힘썼던 것이다. 즉위 초율령(律令)을 개정하여 배심제, 삼심제를 제정하여 죄인을 다스리는데

     

    신중을 기했고, 전제(田制)에도 개혁을 가하여 공신 자손에게 전답을 전해주는 공음전시법(功蔭田柴法) 이란 것을

    제정하였다. 뿐만 아니라 시골 관리의 자제를 선발하여 중앙에 주재시켜 향리와의 사무를 연락케 했으며, 백성을

    사랑하는 정책으로써 특히 노인을 대접했다. 예절을 장려하는 한편 백성의 복지사업, 굶주린 자와 병든 자의 구호,

     

    사학(私學)의 장려 등 그 인정은 사회 전반에 미쳤다. 또 불교를 장려하여 두 왕자 후(煦)와 규(窺)를 출가시켰는데,

    후는 뒷날 대각국사(大覺國師;1055~1101)인데 수많은 불경을 간행한 분으로서 유명하다. 이렇듯 문종의 시대는

    고려의 황금시대를 이루었는데, 문종의 장자로 제12대인 순종(順宗;1047~1083)은 겨우 재위 1년 만에

     

    세상을 떠났고 선종(宣宗;1049~1094)이 제13대로서 즉위했다. 선종 역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식이 풍부하였는데

    동생 후를 송나라에 보내어 불법(佛法)을 연구케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선종 3년 교장도감(敎藏都監)을 흥왕사 안에

    두고 송나라 자변대사(慈辯大師)에게 천태교관(天台敎觀)을 배우고서 돌아 온 의천(대각국사)을 시켜 불서(佛書)를

     

    간행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선종은 재위 11년으로 돌아갔고 원자(元子)인 제14대 헌종(獻宗)이 즉위하였다. 그러자

    헌종 원년 이자겸(李資謙)이란 자가 난을 일으켰다. 이자겸의 할아버지 이자연이 문종의 구(國舅)로서, 그의 딸 셋이

    모두 문종의 비가 되어 권세가 당대의 으뜸이었다. 또 이자겸의 사촌인 이자의(李資義)는 선종 때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있었거니와 선종이 그의 누이 원신궁주(元信宮主)를 맞아들여 한산후(漢山侯) 윤(昀)을 낳았던 것이다. 그런데 헌종이

    겨우 13세로 즉위하자 이자의는 무뢰배를 모아 한산후를 왕으로 추대할 야망을 품었다. 이 음모를 문종의 제3왕자로서

    계림공(뒷날의 숙종)이 평장사(平章事)인 소태보(邵台輔)에게 명하여 진압케 했다. 소태보는 명을 받들고 상장군

     

    왕국발과 더불어 군을 이끌고서 궐내로 들어가 이자의와 그 일다을 참했던 것이다. 그런 전철이 있었건만 이자겸은

    야망을 품고 있었다. 한편 어린 헌종은 재위 1 년 만에 병으로 숙부인 계림공 희(熙)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는데,

    제15대 숙종(肅宗;1054~1105)이다. 숙종은 외척 정치의 발호를 미리 방지했다는데 그 공적이 있었다. 그는 본디

     

    성격이 효성스럽고 부지런하여, 학문도 힘써 박학다식이었다. 숙종 2년 주전관(鑄錢官)을 두어 삼한통보, 동국중보,

    동국통보 등의 쇠돈을 주조 사용케 하는 한편 문학의 진흥, 서적의 정비, 간행에 힘을 써 다시 고려의 황금기를 가져왔던

    것이었다. 특히 의천(대각국사)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홍관과 같은 명신, 학자도 그 빛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홍관은

     

    남양 사람으로 자는 무당(無黨), 숙종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숙종이 재위 10년, 1105년에 승하하고 태자가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예종(睿宗;1079~1122)이 되자, 홍관은 예종의 명을 받아 삼국시대 이래의 사적을 모아 찬집(撰集)

    하였다. 예종은 부왕의 유명을 받들고 동 2년 윤관(尹灌)에게 17만 대군을 주어 동북면의 여진족을 토벌했으며 아홉 개의

     

    성을 쌓게 하였다. 윤관은 파평 사람으로 자는 동현(同玄)이었는데 그야말로 명장이고 충신이었다. 윤관은 문종 28년

    과거에 급제하여 임금이 모르는 허물을 들어 간하는 직책인 습유(拾遺)와 역시 임금을 간하고 조서(詔書)를 바로잡는

    직책인 보궐(補闕)을 역임했다. 이어 숙종이 즉위하자 동국 시강학사, 어사대부, 이부상서, 한림학사, 승지 등을 역임했다.

     

    이것만 보더라도 윤관장군이 문무를 겸한 명장임을 알 수 있으리라. 숙종 9년 여진족이 함흥까지 세력을 뻗치고 행패가

    심하자 조정에서는 임간(林幹)을 보내어 이를 치게 하였으나 오히려 패배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리하여 윤관이 동북면행영

    도총사로서 출정하였으나 적세가 워낙 강하여 강화를 맺고 돌아왔다. 윤관은 여기서 병마의 양성, 특히 기병의 양성과

     

    군량의 여축을 임금께 건의했고 이것이 윤허(允許)되자 별무반이란 특별부대를 조직 양성한 것이다. 예종 2년 여진족이

    침로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윤관이 도원수가 되고 오연총을 부원수로 하여 수륙군 17만 명의 장병이 당당하게 출정했으며

    여진을 여지없이 소탕했다. 이 때 점령지의 중추인 함주를 비롯하여 영주, 웅주, 복주, 길주, 선주, 통태, 평융, 공험의 아홉

     

    성을 쌓고 주민을 이주시킨 뒤 개경으로 개선했다. 그 후에도 여진족은 잃은 땅을 찾고자 침략을 했으나 윤관이 이들을

    번번이 토벌하고 진압시켰다. 이리하여 예종 6년 세상을 떠나자 문경(文敬)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윤관의 여진 토벌은

    이와 같이 혁혁한 것인데 그 힘이 된 민족의 얼이 있었던 것이다. 즉 화랑정신이었다. 사라져 가려는 화랑의 사상을 다시

     

    붙들어 일으킨 것이 고려 제16대인 예종과 윤관장군이었다. 예종 실기를 보면, 그 11년 4월 四仙之跡所宜加榮國仙之事

    比來仕路多門宜令大官子孫行之.의 조서를 내렸다. 이것을 대강 풀이한다면, 사선~ 신라의 永郞, 述郞, 安祥, 南石行인데

    국선의 자취는 마땅히 이를 수복할 것이며 국선은 배울 만한 것이다. 다른 것에 비하여 많기 때문에 조정의 고관 자손들로

     

    하여금 마땅히 이것을 실천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국선이 바로 화랑을 가리키는 말이며 이 조서만 보더라도 예종이 화랑

    정신을 숭상하였고 유관 또한 그 사상의 열렬한 신봉자였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화랑정신은 신라의

    멸망과 소멸된 것이 아니고 이 때 까지 맥맥히 이어지고 있었다. 어쨌던 예종은 재위 17년에 승하하였는데 그의 작품으로

     

    도이장가(悼二將歌)가 있다. 우탁(禹倬)은 단양(丹陽) 우씨로서 진사인 천규의 아들로 1262년에 태어났다. 소년시절은

    전란 속에서 자란 셈이다. 그는 어려서 회현, 안유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충렬왕 4년 진사에 올랐으며 다시 문과에 급제하여

    영해사록(寧海司錄)이 되었다. 영해는 경상도 땅에 있으며 사록은 회계담당 관리였다. 그런데 이 고을에 팔령(八鈴)이란

     

    요신(妖神)의 사당이 있어 민심을 현혹하므로 이를 부숴 바다에 던져버렸다. 그 뒤 감찰규정(監察糾正)이 되었는데 당시의

    충선왕이 숙창원비(淑昌院妃)를 승격시키려하자 그는 흰옷에 도끼를 들고 짚자리를 지고서 대궐 앞에 엎드려 간했다. 왕도

    이 죽음을 건 충간(忠諫)에 몹시 부끄럽게 여겼다고 한다. 나이가 늙자 예안현(禮安縣)에 은퇴하였는데 충숙왕이 그 충의를

     

    어여삐 여기고서 여러 번 불렀으나 끝내 사양했다. 즉 이것만 봐도 그의 성격이 강직했음을 알 수 있다. 충혜왕 임오년에 향년

    81세로 세상을 떠나자 문희(文僖)라는 시호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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