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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충의 시한 자/한시(한국) 2009. 3. 13. 21:54
白日은 西山에 들고 황화수는 동해로 들고
고금 영웅은 北邙으로 드닷 말가
두어라 物有盛衰하니 설은줄이 이시랴
~최 충(崔沖;984~1068)~
<해설>
해는 언제나 서산으로 넘어가고 황화의 물은 늘 그 동쪽 바다에 흘러들고 있다. 이렇듯
예와 지금의 모든 영웅들이 빠짐없이 죽음의 길을 밟아 북망산으로 간단 말인가?
두어라, 이 모든 것이 흥하고 망하는 자연의 이치이니 슬퍼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 배경
최충은 해주(海州 ) 최씨로 자는 호연(浩然), 호는 성재(惺齋), 고려 문종(文宗) 때의
대유학자였다. 그는 목종 8년에 갑과(甲科) 수석으로 급제하여 벼슬 길에 나섰는데
문종이 왕위에 오르자 문하시중(文下侍中)에 올랐다. 고려의 문종은 제11대로서 성군
이다. 이름을 듣는 명군(明君)이었으며 문종이 다스리던 37년 간은 고려의 전성기라
할 만큼 태평스런 시대였었다. 최충은 도병마사(都兵馬使)가 되어 서북도의 궁핍을
상주하고 그 부역을 없애게 하는 등 공이 많았으나 문종 7년 나이 칠십이 되자 벼슬
을 사양했다. 그리고 벼슬을 내놓은 뒤에도 후진을 교육하였는데 사방에서 학도들이
구름같이 모여 들었다고 한다. 이 때 그는 반을 아홉 개, 즉 악성(樂聖), 대중(大中),
성명(誠明), 경업(敬業), 조도(造道), 솔성(率性), 진덕(進德), 대화(大和), 대빙(待聘)
으로 나눠 가르쳤는데, 우리나라의 사학(私學)을 시작하였다고 하여 해동공자(海東
孔子)라고 불렸던 것이다. 이렇듯 학문과 국가에 대한 공적을 다한 분이었으나 우주
대자연에 대한 이치 앞에서 한 가닥 무상감을 느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사람이란 한 번 태어났다가 한 번 죽게 되는 것은 정한 법이기 때문이다. 문종 22년
향년 85세로 돌아가자, 문헌(文憲)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원주의 거돈사(居頓寺) 원
공국사(圓空國師) 승묘(勝妙) 탑의 비문과 직산(稷山)의 홍경사(弘慶寺) 개창비문은
그가 찬(撰)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