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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섬진강
    일탈/가보고 싶은 곳 2008. 9. 23. 11:34

     

     

    봄을 기다리는 것은 이른 아침 찬바람을 맞으며 적막하게 선 나뭇가지의 앙상함이 안쓰럽기 때문이다. 무거움에 짓눌렸던

    무채색 나무의 끝자락에 향긋한 봄바람이 살랑 불면 이내 새 생명의 움틈이 살갑게 다가온다. 봄은 질척거리는 땅 끝으로 소리

    없이 내려앉는다. 겨우내 부는 황량한 바람만큼 얼었던 땅은 남쪽 바다에서 불어댄 훈풍에 스스로 몸을 연다. 부서지는 겨울은

     

    물을 뿜어낸다. 그래서 땅은 질척이고 그 부서지는 겨울의 틈새로 새싹들은 움찔거리며 제 할 일을 한다. 서서히 검고 무겁고

    두꺼운 겨울옷이 벗어던져지고 밝고 가볍고 얇은 봄옷이 이 땅에 입혀진다. 이렇게 봄은 바람을 타고 땅 끝으로 와서 풀들을

    깨우고 나무를 깨우고 사람을 깨운다. 남도의 봄은 이렇게 시작한다. 남도 따라 흐르는 섬진강 또한 그러하다. 연안에 있는

     

    황어떼가 따뜻한 바람 따라 섬진강을 거슬러 오를 때면 강가 둔덕 위로 지천인 검은빛 매화 가지에 푸른빛, 붉은빛, 흰빛이

    서린 매화가 한창 피어오른다. 섬진강은 덕유산과 지리산 계곡의 맑은 물이 모여 만든

    강이다. 섬진강의 쪽빛 물은 따뜻한 봄볕을 받아 아지랑이를 뿜어내고 그 아지랑이는

     

    매화나무를 촉촉이 적시며 두툼한 가지 끝에 연분홍 꽃구 름을 만들어낸다. 이때가

    혼돈이다. 겨울의 넋두리가 끝나기 전에 봄의 광기가 시작되니 홀로 고매할 수 없어

    혼돈인 것이다. 미친 세상이니 미쳐서 보면된다. 매화꽃 잔치는 이렇다. 섬진강 따라

     

    길게 늘어진 다압면은 매화로 유명하다. 섬진마을, 다사마을, 고사마을 등으로 이어지는

     861지방도로는 매화꽃 잔치 드라이브 코스로는 나라의 으뜸이다. 은모래와 쪽빛으로

    물든 섬진강, 그 강둑 밭에 익어가는 청보리, 바람에 일렁이는 대밭, 그리고 은은한

     

    매화 향기에 속내를 다 보인 바람난 아낙네들의 뒷모습과 봄볕에 이끌려 쏘다니는

    남정네들의 마음이 이 길 따라 이어진다.

     

     

     

     

     

     꽃매실의 육질은 짱짱하고 쓰면서 신맛이 좋다. 매화마을의 잔치는 ‘물반 고기반’이 아니라 ‘꽃 반 사람 반’이다. 꽃 찾아  벌떼

    처럼 꽃놀이패들이 몰려온다. 갖가지 마음으로 찾아와 한마음으로 가는 듯하다. 봄에 미쳐서 돌아간다. 미치는 건 사람만이

    니다. 드러난 매화나무 밑에서 봄을 맞이하는 들풀들은 놀이패들의 발에 짓밟혀 따사로운 봄볕도 채 맞기

     

    전에 뭉개져버리니 들풀 또한 미쳐버린다. 드러 나지 않은 것들의 소중함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 꽃놀이패들의 빈자리를 찾는 이들도 있다. 이른 아침 매화 향이 가장

    강렬할 때나 늦은 오후에 찾아오는 이들은 주로 스님네들과 매화꽃차를 만드는 이들이다.

     

    이네들의 움직임은 조심스럽다. 드러나지 않은 들풀들의 생명도 아끼지만 매화나무 주인

    몰래 아직 덜 핀 매화 몽우리를 솔솔 따는 이중성의 두근 거림에 움직임이 조용하다. 덜 핀

    꽃망울을 그늘에 말려서 만드는 게 매화차다. 강 너머 악양과 화개는 녹차로 유명하다.

     

    녹차는 한 번 자리 잡으면 예닐곱 잔 마신다. 끝물에 녹차 향이 사라지면 말려놓은 매화꽃

    하나를 찻잔에 띄운다. 이내 다섯 장의 꽃잎이 활짝 열리면 매화 향이 찻잔에 가득해진다.

     다향과 매향의 만남이다. 천년의 미소를 머금듯 여유잡고 마시는 녹차의 끝자락이 화들짝

     

    황홀경으로 가는 것이다. 매화 향은 이만큼 강렬하다. 강렬했던 백운산 매화는 산산이 부서

    바람을 타고 남쪽의 봄을 섬진강 너머 지리산 벚꽃에게 주고, 이 벚꽃은 다시 흩날

    리는 꽃비 되어 어린 야생 찻잎에게 봄을 넘긴다. 계단식 논배미의 보리는 점점 짙어져

    ‘맥추(麥秋)’를 부르고 봄은 장자의 꿈처럼  간다.

                                                                                                         출처 ~ 김주헌 여행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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