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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찾아서일탈/가보고 싶은 곳 2008. 9. 22. 23:25
명문가 이야기’라는 책을 쓴 조용헌 교수는 책 서문에서 매천 선생의 시를 인용하며 글깨나 읽은
사람으로 구차하지 않게 살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 같다 고 토로하였다. 또한 이제는 우리도 그 동안
소홀히 한 인간으로서의 자존심과 품위를 생각해볼 때가 되었다며 역사성, 도덕성 그리고 집안의
인물이라는 명문가의 기준을 제시하였다. 바쁘고 힘겹게 세상을 살아온 우리에게 사실 명문가라고
하는 것은 별로 생각하고 싶지도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던 기억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어쩌면 한 겹
만 들춰보면 알 수 있는 투기와 과소비를 일삼는 졸부들이나 권력이나 금력을 좇아 수시로 변절을
일삼던 무리 들의 가문 타령쯤으로 치부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유서 깊은 명문가를 찾는 우리의 마음은 더 이상은 구차하지 않게 살고 싶다는 마음,그리고 우리의 아이들에게 정말 소중하게 지켜야 할 자존심과 품위가 무엇인지를 일깨워주고 싶다
는 소망이 담겨 있다. 그래서 높은 수준의 인문적 지식을 바탕으로 인간과 자연을 아우르며 삶의
가치를 추구하던 선비와 예술가들의 고택을 찾아 나서는 것은 더욱 의미가 있을지 모른다.
옛 선비들과 예술가들이 살았던 그 집에서 직접 보고 만지고 느껴 가면서 이제부터라도 저마다
새롭고 훌륭한 우리 집안만의 전통을 만들어 가고 우리의 아이들이 함께 노력하는 가운데 스스로
명예를 깨닫게 된다면 이 또한 대를이어 가문의 발 복을 위한 첫 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강릉의 선교장
선교장이 있는 북평촌은 강릉에서도
명승지로 알려져 있다. 오죽헌에서 동해
쪽을향하여 서면, 바로 마주 보이는 곳에
벽송수백 그루가 우거진 골짜기가 있고,
그 사이로 고옥이 그 날아갈 듯한 추녀
일부만을 드러낸 그윽한 자세로 은거해
있는 것이 보인다. 이곳이 문화재로 지정된 전주 이씨 가문의 배다리 선교장이다. 화기에 찬
우애와 시문을 즐기는 풍류생활을 이상으로 여겼던 선비 오은 거사는 선대 부터 있던 인채에
이어서‘열화당’을 건립하고, 열화당 뒷산에는 ‘팔각정’을 지어 송림 속에서 동리를 굽어볼
수 있게 했으며, 동구에다가는 연못을 파 연을 심고 그 가운데다‘활래정’을 지어 풍류의 모임을
갖고는 했다. 선교장 건물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일반 주택이라기보다는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명실상부한 장원으로, 특히 자유스러운 너그러움과 인간생활의 활달함이 가득한 것이 특징이
라고 건축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다. 한때 동대문에서 강릉까지 갈 때 남의 땅을 밟지 않고 갔다고
할 만큼 소문난 부잣집인 이 가문은 흉년에는 쌀 수천석을 풀어 군민들에게 나누어주고 소작인들
에게도 인심이 후해 만 명의 소작인이 그 보답으로 옥양목에 일일이 서명을 해서 '만인솔'이라는
우산을 만들어 주었다고도 한다. 주위 사람들에게 인심을 잃었다면 수백 년 격변의 세월 속에서
선교장이 오늘날의 그 자태를 온전히 보전할 수 없었으리라는 점에서 향토의 명문가들이 지켜온
높은 도덕성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추사 김정희의 고택
추사 고택은 추사 김정희가 태어나 어린시절
을 보냈고 장성한 후에는 서울 본가에 살면
서도 자주 내려와 사색과 서화에 몰두했던
집이다. 이 집은 김정희의 증조부가 18세기
중엽에 지은 것으로 원래는 53간이 넘는 큰
집이었지만 지금은 대문채와 ㄱ자형 사랑채,
ㅁ자형 안채, ㅡ자형 사당채만 남아 차례로
계단을 이루며 일곽을 이루고 있다.
집안 구석구석에 세심한 배려가 깃들어 격조 높은 반가 살림집의 한 모범을 보여 준다. 단아함
속에 은은한 묵향이 배어나오는 듯한 느낌으로 바위산 하나 보이지 않는 편안한 집터가 전형적인
충청도의 산세를 잘 드러내고 있다. 집 지을 때 충청도 53개 고을에서 한 간씩 나눠 맡아 53간을
지었으며 서울 목수를 불러 시공했다고 한다. 또한 이 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기둥 마다
걸린 주련(柱聯)이다. 주련은 기둥 등에 장식으로 써 붙이는 글로 조선에서 제일가는 명필의
글씨와 그 깊이와 넓이를 헤아리기 힘든 인식의 세계를 잘 드러내고 있다. 사랑채 마당 앞 화단의
돌해시계에 새긴 석년(石年)을 비롯해 화암사 암벽에 새겨진 신필, 집안 구석구석 세련된 멋을
부린 갖가지 창호들, 백송이나 추사 묘소 앞의 반송, 화순옹주의 전설 같은 순애보, 철 따라
바뀌는 동구 밖의 사과밭이나 들판 풍경 등으로 추사의 고택은 언제나 찾는 이들에게 문자의 향기
(文字香)와 서권의기(書卷氣)를 느낄 수 있게 한다.
양천 허씨의 운림산방
운림산방은 조선조 고종 때 시서화(詩書畵)의 삼절
이라 불리던 소치 허유가 1857년 고향인 진도에 돌
아와서 화실을 겸해 지었던 집으로 현재 23평 규모
의 한옥 화실과 50여 평 규모의 유물관, 480평의
연못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은 보통의 주택이 갖
고 있는 실용적인 쓰임새보다는 소치의 말년 예술
혼을 불태우던 창작의 산실이라 할 수 있으며 기와
가 아닌 초가집인 것이 이채롭다. 또한 이곳에서
소치의 아들인 미산 허형과 손자인 남농 허건이
태어 났으며 그의 고손자인 의재 허백련이 화필을 익혀 ‘남종화의 성지’로 받들어지고 있다.
집 앞쪽에 인공으로 조성된 운치 있는 연못에는 백일홍이, 집 뒤쪽의 첨찰산에는 동백나무 숲이
운림산방을 중심으로 한 폭의 동양화를 그려내고 있다. ‘진도의 양천 허씨들은 빗자락 몽둥이만
들어도 명필이 나온다’는 말처럼 5대에 걸쳐 걸출한 예술가들을 배출하고 있는 흔치 않은 집안의
내력 이 이 집을 둘러싼 풍수의 비기에도 관심을 갖게 한다. 고산 윤선도의 녹우당에서 볼 수
있는 유사한 풍수형국, 즉 장중하고 호방하며 평화롭기까지 한 이곳의 집터는 오랫동안 발복이
유지되는 터라고 이야기한다. 첨찰산에 빼곡한 동백꽃이 만발하면 이곳 운림산방의 운치는 더해
가고 한국 최고의 예맥이라 칭해지는 이곳에서는 또 다른 큰 예술가의 출현을 기대해본다.
윤선도의 고택
우리 무학을 우리 글로우리의 정서를 나타낸 것이
어야 한다고 규정한다면 고산 윤선도는 분명 우리
문학의 비조(鼻祖)이다. 그는 한평생의 대부분을
유배와 낙향으로 산속이나 외딴섬에서 보냈다.
해남의 금쇄동에 은거했을 때는 산중의 풍취와
자신의 회포를 그린 산중 신곡 22수를 썼고,
완도의 보길도에 있을 때는 어부사시사(漁父四
時詞) 40수를 남겼다. 해남 윤씨의 종가‘녹우당’
은 전라남도에 남아 있는 민가 가운데 가장 규모
가 크고 오래되었다. 녹우당은 고산이 수원 에 있을 당시 효종이 고산에게 하사한 집을 고산이
82세되던 1669년 뱃길로 해남까지 옮겨와서 다시 지은 집으로 녹우당이 지어짐으로해서 원래
ㄷ자로 있던 집이 ㅁ자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형식적인 아름다움에만 치우치지 않고 실제 생활에
편리를 좇아 차양을 내어 달고 부엌의 환풍구가 지붕 위로 내어져 있는 등 고정관념을 깬 매우
파격적인 양식으로 고산의 실용적이고 창조적인 면모를 볼 수 있다. 또한 윤선도의 고택은 건물
뿐만 아니라 그 터에서 느껴지는 호방함이 단연 으뜸으로 진귀한 장서와 화첩을 소장하고 호남
남인들의 학문과 예술의 요람으로 자리했으며 역대 풍수 대가들의 반열에 들어 있는 윤선도의 천문
과 지리에 대한 식견과 지혜를 전하고 있다. 명문가의 고택들을 돌아보다보면 한 가지 느끼는 것
이 있다. 그것은 풍수지리에 대하여 전혀 문외한인 사람들조차 ‘참 좋은 곳에 좋게 자리잡았구나’
하는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다. 고택들마다 집터를 구하기까지의 많은 사연들과 저마다의 풍수비기
를 간직하고 있지만 결국 아름다운 자연과 그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건축물들은 역시 자연에 순응
해서 자연과 함께 살아가고자 했던 그 집 사람들의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때문에 그러한 자연의
순리를 깨달아 스스로 자신을 경계하고 후손들을 훈육했기에 수백 년을 이어 가문의 발복을 이룰
수 있었으리라 짐작 된다
출처 ~ 한전 뉴스레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