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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해 봉황동 유적지
    일탈/여행사진 2014. 7. 6. 15:06

    어린이집 다니는 이레를 김해봉황유적지에 데리고 갔다. 지난 번 김수로왕능에 갔을 때

    어린 '이레'가 피곤할까 봐 다음에 보자 하고 생각했었는데 이번 토요일에 같이 나왔다. 

    '이레'하고는 박물관이며, 유적 유물이 있는 곳을 가끔 가는 편이라 내가 "갈래" 하면, "가자"

     

    하며 얼른 따라나선다. 기특하다. 같이 다니면서 이것저것 많이도 묻고, 이것저것 관심있게도

    본다. 여기 저기 관심(?)있게 보는 귀여운 모습에 손 잡고 즐겁게 유적지 전체를 둘러보았다.

    김해봉황동유적지는 가야시대 대표적인 조개무덤으로 1907년 우리나라 최초로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졌던 회현리 패총과 금관가야 최대의 생활유적지인 봉황대가 합쳐져서 2001년2월5일 김해

    봉황동 유적으로 확대 지정되었다. 패총에서는 소위 김해식 토기와 각종철기, 골각기 등과 함께

    중국 왕망시대(AD 8~23)의 ‘회천’이라는 동전이 출토되어 당시의 교역상황을 나타내 주고 있으며,

     

    특히 우리나라 최초로 불에 탄 쌀이 출토되어 쌀농사의 기원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었다. 또한

    구릉위에는 황세장군과 여의낭자의 슬픈 전설과 관련된 여의각, 황세바위 등이 남아 있으며

    가야시대 고상가옥, 주거지 등이 발굴되었다. 2002년~2005년 해상포구, 고상가옥, 수혈주거,

     

    망루, 목책 등을 복원 정비하였으며 1999년3월 부산대 박물관에서 회현리 패총을 재발굴하여

    2006년 단면전시관 형태로 개관하였다 한다.

     

     

     

     가야의 배(舟)

    가야는 고대 동아시아의 여러 지역과 교역을 통해 성장한 정치체이며 수로와 해로를 통하여 한사군에도 수출하였다.

    가야의 배는 현재까지 실물이 발굴된 사례는 없으나, 가야시대의 배를 본떠 만든 배 모양 토기가 여러 점 남아 있어

    구조와 형태, 크기 등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 복원된 배는 호림박물관에 소장된 배 모양 토기를 토대로

    당시의 항해술과 선박의 구조 등을 고려하여 제작한 것으로, 가야시대 조선술과 선박구조의 일면을 엿 볼 수 있다.

     

     봉황동 유적지에서 메뚜기를 잡고 있는 '이레'

     

    가야의 망루

    여기에 세워진 망루는 가야시대 당시의 건축기술과 구조를 고려하여 추정 복원한 것으로 높이는 약 10m 이다.

    망루는 주변을 효율적으로 관찰하고 경계하기 위하여 높은 곳에 지은 건축물로서 외부침입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는

    시설의 일종이다. 이러한 망루는 청동기시대의 취락유적에서도 많이 확인되고 있으며 가야시대에도 널리 사용되었다.

    특히 봉황동 유적은 금관가야의 도성유적으로 해안가에 위치하고 있어 선박의 진, 출입과 외적의 침입을 관찰 감시

    하기 위해 어느 곳보다 많은 망루를 설치하였다.

     

    '이레'가 망루를 배경으로

     

     고상가옥과 수혈주거

    여기에 복원된 고상가옥과 주거 등은 봉황동 유적에서 발굴 조사된 가야시대 건물지 등을 참고로 하여 2002년

    복원한 것이다. 가야시대의 일반적인 주거형태는 반지하식으로 땅을 파고 그 위에 벽과 지붕을 올리는 형태이다.

    고상가옥은 가야시대이 보편적인 주거형태인 수혈주거와 달리 바닥면이 지면보다 높게 만든 건축물로서 주로

     

    곡식 등을 저장하는 창고나 제의 등과 관련한 특수용도의 건축물이 많다. 고상가옥은 난방시설이 용이하지 않아

    일반 주거용 건물로는 부적합하지만 지면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 만들어져 짐승과 습기, 침수 등으로부터 방해,

    방재의 효과가 있기 때문에 창고 등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가야인들의 주거지 앞에서 폼 잡은 '이레'

     

     

     

     황세바위

    황세는 가락국의 9대 임금 겸지왕(숙왕) 때의 인물로 황정승의 아들이다. 황정승과 친구사이인 출정승은 각기

    아들을 낳으면 의형제를, 아들과 딸을 낳으면 서로 결혼시키기로 약속하였으나, 황정승의 집안이 몰락하자

    출정승은 딸인 여의를 아들이라고 거짓말을 하였다. 의형제를 맺은 황세와 여의는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랐는데.

     

    어느 날 황세가 여의에게 오줌 멀리 주기 시합을 제이하자 여의는 삼대줄기를 사용하여 위기를 넘겼는데,

    이 시합을 한 곳이 바로 황세바위다. 여의가 자라면서 점점 여인의 모습을 띠게 되자 이를 수상히 여긴 황세가

    거북내(해반천)에서 멱을 감자고 하였는데 여의는 할 수 업시 잘기가 여자임을 밝히고 둘은 결혼을 약속하였다.

     

    그 수 신라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황세가 왕의 명을 받아 유민공주와 결혼하게 되자 여의낭자는 황세장군을

    그리워하며 죽었다. 황세 또한 여의 낭자를 그리워하며 병을 얻어 그해에 여의낭자를 따라 죽었으며, 유민공주는

    유민산(임호산)으로 출가하여 여승이 되었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황세바위 앞에서의 '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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