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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주 부석사
    일탈/여행사진 2014. 6. 20. 16:02

    나날이 평범했던 일상에 재미와 변화를 주고,  익숙했던 모든 것들을 집밖에서 훌훌털고 오자는 생각에 낯설고 물선

    땅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눈에도 넣고 가슴에도 담아 오려고 그냥 혼자 훌쩍 떠나는 여행 시간을 만들어 보았다.

    친구와 같이 가면 심심하지는 않겠지만, 지난 달 친구와 같이 다녀 온 순천 여행보다 좀 더 자유스러운 여행을 해보고자.

     

    이번에는 혼자 출발했다. 혼자 가야 자신을 추스러고, 다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이번 영주 여행은

    인터넷 검색으로 행선지의 동선을 정하고 지난 17~18 평일에 가볍게 열차와 버스를 이용해 영주를 둘러보았다.

    여행의 첫 목적지로 무섬마을을 정하고 영주역 건너편 버스정류장 앞 식당에서 민생고를 해결한 후 3번 버스를 타고

     

    영주여객으로 이동했다. 영주의 모든 곳으로 출발하는 버스가 다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첫날은 영주 무섬마을을 

    둘러보고 여행 둘째날 소수서원과 선비촌 그리고 영주부석사를 둘러보기로 계획을 세웠었고, 메뉴얼대로 정확하게 

    움직였다. 이번 영주 여행에서 무섬마을, 소수서원, 선비촌, 부석사를 둘러보면서 차분히 찍은 사진을 나의 블로그에 

     

    올리고 나니 비로소 여행을 갔다왔구나 싶다. 영주 여행시 한가지 익숙해진 것이라면 영주역에서 시내버스터미널 그러니까

    영주여객까지 처음에만 버스를 탔고 그 다음부터는 약 25분여 소요되는 거리를 걸어 다닌 것이 가장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 버스 시간표(영주여객 ~ 부석사)

    55번/06:10, 06:20, 08:00, 09:40, 10:30, 11:00, 12:00, 13:20, 14:00, 15:30, 16:30, 17:40, 18:50

    27번/06:50, 07:40, 08:50, 10:00, 11:20, 12:20, 13:10, 14:20, 14:50, 15:50, 17:00, 18:20, 19:20,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 해동(海東) 화엄종(華嚴宗)의 종조(宗祖)인 의상대사가 왕명(王命)으로 창건(創建)한 화엄종의

    수사찰(首寺刹)이다. 대사가 당(唐)나라에 유학하고 있을 때 당고중(唐高宗)의 신라 침략 소식을 듣고 이를 왕에게 알리고 그가 닦은

    화엄의 도리로 국론을 통일하여 내외의 시련을 극복하고자 귀국하여 이 절을 창건하였으며 우리나라 화엄사상의 발원지가 되었다.

     

    부석사라 이름하게 됨은 불전 서쪽에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는 아랫윗바위와 서로 붙지 않고 떠 있어 뜬돌이라 한데서 연유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선달사 혹은 흥교사라 불리었다. 1916년 해체 보수 시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에 의하면 고려 초기에 무량수전(無量壽殿)을

    중창하였으나 공민왕 7년(1358) 적의 병화(兵火)를 당하여 우왕 2년(1376) 무량수전이 재건되고 우왕 3년(1377) 조사당(祖師當)이 재건

     

    되었다. 경내에는 신라시대 유물인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제 17호), 석조여래좌상(보물 제 220호), 삼층석탑(보물 제 46호), 소조여래좌상

    (국보 제 45호), 조사당벽화(국보 제 46호), 고려각판(보물 제 735호), 원융국사비 등이 있다. 특히 무량수전은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물 중

    하나이며 조사당벽화는 목조건물에 그려진 벽화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현재 유물관 안에 보관되어 있다. 무량수전 안에 봉안된 여래좌상은

    국내에 전래하는 최고의 소상(塑像)이고, 무량수전 서쪽에 있는 우물은 의상대사의 호법룡(護法龍)이 살았다는 우물이라 전한다.

     

    부석사 버스 종점에 내리면 시원한 인공폭포가~

     

    부석사 일주문, 태백산부석사로 적혀있다

     

     부석사 당간지주(보물 제 255호)

    당간(幢竿)은 절에서 불교 의식이 있을 때 불(佛) 보살(菩薩)의 공덕을 기리거나 마귀를 물러칠 목적으로 달았던 ‘당’이라는 깃발의

    깃대를 말하며, 이 깃대를 고정시켜 주기 위해 세우는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이 기둥은 통일신라시대 당간지주로 부석사 입구에

    위치해 있으며 높이는 428cm 이다. 양 기둥 꼭대기에는 내면(內面) 상단에서 외면으로 내려오면서 호선(弧線)을 그리며 외부로 깍여

     

    졌는데, 1단의 굴곡을 두었다. 이 굴곡부에서 앞뒷면의 중앙에 종선문(縱線紋)이 내려오고 정상부에서 2단의 아름다운 원호(圓弧)가

    경사진 형태로 조각되었고, 측면은 3조의 종선문이 있다. 당간지주 사이에는 연꽃잎을 장식한 원형의 간대석(杆臺石)이 놓여져 있다.

    전체적으로 소박하고 아름다우며 간결하고 단아한 수법으로 보아 부석사 창건과 함께 7세기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된다. 

     

     부석사의 쌍탑  서쪽, 동쪽의 3층 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130호)

     이 탑은 통일신라 후기 3층 석탑으로 쌍 탑이다. 높이는 동탑이 360cm, 서탑은 377cm 로 두 탑의 크기와

     양식이 거의 같다. 이중기단(二重基壇) 위에 3층의 몸돌을 올린 것으로 무량수전의 동쪽에 있는 석탑과 같은

    형식이다. 전체적으로 짜임새가 있고 정재된 모습으로 신라석탑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범종루

    일주문과 달리 여기에는 봉황산부석사로 적혀있다. 사찰이 있는 이 산이 봉황의 형상이라 그리 이름 붙였다.

    그리고 범종루의 종은 국란 때 무기로 쇠붙이는 다 징발당하고, 나라가 평안을 찾고 나서 새로 종을 만들었다.

    원래 있던 종은 이곳에 달 수 있는데 새로 만든 종은 이곳에 달 수 없기 때문에 범종루 왼편인 서쪽에 새로  

    종각을 지어 그곳에 달아놓았다. 

     

      

     

    안양루

    부석사의 안양루는 무량수전 앞에 놓인 누각이자 산 아래에서 부석사를 들어 올 수 있는 다락문이다. 특이한 것은 안양루에는 편액이 2개인데,

    절 입구에서 올라 오는 방향의 난간 아래쪽은 안양문이라 하고, 무량수전 쪽에서 보는 편액은 안양루라고 되어 있다. 안양은 극락을 뜻 한다니,

    안양문은 극락에 이르는 문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니 안양문을 지나 오르면 바로 부처님의 도량인 무량수전이 정면으로 나오는 구조로 되어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 서쪽에 있는 부석

    신라 문무왕 1년(661) 의상스님이 화엄학을 공부하기 당나라에 갔을 때 의상스님을 연모한 ‘선묘’라는 낭자가 있었다. 의상스님이 장안

    종남산 지상사의 지엄삼장 문하에서 10년간의 수학(修學)을 마치고 심오한 경지에 이른 후 귀국 뱃길에 오르자, 뒤늦게 소식을 들은 선묘가

    선창으로 달려갔으나 의상스님이 탄 배는 벌써 수평선 위로 사라지고 없자 바다에 몸을 던져 용으로 변신하여 의상스님이 탄 배를 호위,

     

    무사히 귀국하게 하였다 한다. 그 후 의상스님이 화엄학을 펴기 위하여 왕명으로 이곳 봉황산 기슭에 절을 지으려고 할 때 이곳에 살고 있던

    많은 이교도들이 방해하자 선묘신룡이 나타나 조화를 부려 이 바위를 공중으로 들어 올려 물리쳤다 하여 ‘부석’이라 불렀다고 한다. 조선

    숙종 때 이중환의 택리지 기록에 의하면 ‘아랫바위와 윗바위 사이에 약간의 틈이 있어 실을 넣어 당기면 걸림 없이 드나들어 뜬 돌임을 알 수

     

    있다’라고 적혀 있다. 이리하여 절 이름을 ‘부석사’라 불렀으며 그 후 선묘신룡이 부석사를 지키기 위해 석룡으로 변신하여 무량수전 뜰

    아래 묻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부석사의 무량수전(국보 제 18호)

    이 건물은 부석사의 본전(本殿)으로 보처(補處 : 주불의 좌우에 모신 보살) 없이 화엄도량(華嚴道場)에 서방극락세계의 주불인 아미타불

    (阿彌陀佛)을 모시고 있다. 신라 형식으로 보이는 돌기단 위에 초석을 다듬어 놓고 그 위에 배흘림 기둥을 세웠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주심포(柱心包 : 기둥머리에 얹은 포) 양식의 대표적 건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 중의 하나로

     

    유명하다. 고려 현종(顯宗) 7년(1016) 원융국사(圓融國師 964~1053)가 중창 하였다. 1916년 실시된 해체 공사 때 발견된 서북족 귀공포의

    묵서명(墨書銘에)는 공민왕(恭愍王) 7년(1358) 왜구에 의하여 건물이 불타서 우왕(禑王) 2년(1376) 다시 지었다고 되어 있다. 조선 광해군

    (光海君) 3년(1611)에 서까래를 갈고 단층을 하였으며, 1969년에도 보수하였다. 건물 천정부의 아름다움과 장엄함은 외관의 세련된 풍모와

    아울러 한국건축의 가장 빼어난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부석사의 석탑(보물 제 249호)

    이중기단(二重基壇) 위에 3층 몸돌을 쌓은 전형적인 석탑이다. 높이는 526cm 로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되었다. 하층 기단의 너비가 지나치게

    넓고 초층(初層) 몸돌이 높이에 비해 그 너비가 넓어 장중해 보인다. 1960년 해체 수리 당시 3층 몸돌 중앙에 얕은 방형사리공(方形舍利孔 :

    사리구를 넣기 위해 판 구멍)이 발견되었으나 사리구는 없어졌고, 기단부에서 철제탑, 불상파편, 구슬 등이 발견 되었다. 이때 일부 파손된

    부분은 새로운 부재(部材)로 보충 하였다. 탑은 원래 법당 앞에 건립되는 것이 통례인데, 이 석탑은 법당 동쪽에 세워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부석사 무량수전과 3층 석탑

     

     부석사의 조사당(국보 제 19호)

    이 건물은 무량수전 우측 위쪽에 위치한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이다. 1916년 수리 중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에 의하면 고려

    우왕(禑王) 3년(1377)이 건립 연대로 되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조선 성종(成宗) 21년(1409) 중수(重修) 하였고, 동왕 24년(1493) 단층을

    하였다. 조사당 건물 내부 입구 좌우에 제석천(帝釋天), 범천(梵天), 사천왕상(四天王像)의 벽화가 그려져 있었는데 1916년 수리하면서 떼어

     

    내어 지금은 보장각(寶藏閣)에 보관하고 있다. 조사당 전면 처마 아래에서 자라고 있는 선비화는 의상대사가 꽂은 지팡이가 자란 것이란

    전설이 있다. 부석사 제 2의 목조 건물로 고려시대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선비화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 나무는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조사(義湘祖師)가 중생(衆生)을 위하여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이곳 조사당(祖師堂)

    처마밑에 꽂았더니 가지가 돋아나고 잎이 피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하며, 비와 이슬을 맞지 않고서도 항상 푸르게 자라고 있다. 일찍이

    퇴계이황(退溪李滉) 선생이 부석사를 찾아와 이 선비화에 대한 시(詩)를 짓기도 하였다 한다. 이 선비화의 학명(學名)은 골담초(骨擔草)라고 부른다.

     

    擢玉亭亭倚寺門 (탁옥정정의사문)

    僧言卓錫化靈根 (승언탁석화령근)

    杖頭自有曹溪水 (장두자유조계수)

    不借乾坤雨露恩 (부차건곤우로은)

     

    옥 같이 빼어난 줄기 절문에 기대었는데

    지팡이가 신령스러운 나무가 되었다고 스님이 일러 주네

    지팡이 끝에 원래 조계수(曹溪水)가 흐르는가

    하늘과 땅이 내리는 비와 이슬의 은혜를 빌리지 않았네

     

    퇴계 이황(1501 (연산군 7) ~ 1570 (선조 3))

     

     석등(국보 제 17호)

    이 석등은 통일신라시대 일반형 석등으로 가장 아름답고 우아한 작품이다. 팔각을 기본형으로 삼고 네모난 지대석(地臺石 ) 측면에는 안상(眼象)을

    2개씩 배치되고 그 위의 아래 받침돌은 큼직한 연꽃 조각을 얹어 가운데 기둥을 받치고 있다. 팔각의 가운데 기둥은 알맞은 높이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불을 밝혀주는 화사석(火舍石) 사면에 도드라지게 새긴 보살상(菩薩像)이나 연꽃무늬 등은 우수한 조각으로 손꼽히고 있다. 연꽃 하대석은

    조각된 8엽 복판 연꽃의 첨단부에 귀꽃의 장식문이 부착되어 있다. 제작 연대는 9세기 중엽으로 추정된다.

     

     

    그리운 부석사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

    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아미타불이 모가지를 베어서 베개로 삼겠느냐

    새벽이 지나도록

    마지(摩旨)를 올리는 쇠종 소리는 울리지 않는데

    나는 부석사 당간지주 앞에 평생을 앉아

    그대에게 밥 한 그릇 올리지 못하고

    눈물 속에 절 하나 지었다 부수네

    하늘 나는 돌 위에 절 하나 짓네

     

    * 정호승 시집 '내가 사랑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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