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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람들이 남긴 유언
    쉼 터/잠깐 쉬며.. 2011. 9. 14. 18:58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필립 2세의 하인이 늘 전쟁터에서 살다시피 하는 필립 2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언젠가는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소서.” 순서도 없이 불쑥

    찾아오는 것이 죽음이고. 권력자든 평민이든 모두가 반드시 겪게 되는 것이 죽음이다.

     

    이러한 죽음을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프랑스 사상가 몽테뉴는 “우리는 죽음에 대한

    걱정으로 삶을 엉망으로 만들고 급기야 삶에 대한 근심으로 죽음을 망쳐 버린다.“ 또 “잘

    죽을 수 있도록 차분하게 준비한다면 남아 있는 삶도 더 진지해지고 평온해질 것이다.”

     

    누구나 필연적으로 겪는 것이니 ‘잘 죽는 것’에 진지하게 고민하거나 아름다운 죽음을 준비

    하는 것도 필요하겠다. 사람들이 죽을 때 어떤 마지막 말들을 남겼는지 ‘이경기엮음’ 책에서

    옮겨 본다.

     

    ♣ 플라톤(Platon, BC 427~347)

     

    "어느 누구도 죽음이 무엇인지 모른다,

    하지만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다.“

     

    당시로선 비교적 장수를 누린 플라톤이 죽음을 맞으면서 한 말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젊었을 때는 정치를 지망했으나 소크라테스가 사형되는 것을 보고 정치에 미련을

    버리고 인간 존재의 참뜻이 될 수 있는 것을 추구해 철학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BC 387년경

     

    아테네의 근교에 학원 아카데메이아를 개설하고 작지에서 청년들을 모아 연구와 교육 생활에

    전념했다. 아카데메이아 입구에 ‘기하학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이곳에 입학할 수 없다.’는

    문구를 새겨 넣은 것으로 보아 그가 수학과 천문학에도 상상한 조예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스승인 소크라테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심지어 소크라테스만이 진정한

    철학자라고 공공연히 말할 정도였다. <소크라테스의 변명>, <파이돈>, <향연>, <국가론> 등

    많은 저술에 소크라테스를 자주 등장시킨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아름다움과

     

    선(善), 영혼 불멸성에 대한 믿음을 강조했다. 또한 교육을 통해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있으며

    철학자가 국가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했었다. 실제로 그는 두 번이나 시칠리아 섬을

    방문해시라쿠사의 참주(僭主) 디오니시오스2세를 교육하고 이상 정치를 실현하고자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특히 스승 소크라테스가 통치 행위를 놓고 직설적인 의견을 밝혔다가 고초를

    겪는 과정을  지켜본 뒤로는 철학자가 지배하는 이상적인 국가를 이루겠다는 꿈을 버리고 정치

    행위에 대한 견해를 밝히는 것을 극히 자제한 것으로 알려졌다.

     

    ♣ 클레오파트라 7세(BC 69~30)

     

    "그래, 네가 거기에 있었구나.“

     

    클레오파트라가 자신을 물려고 덤비는 독사를 보고 한 말이다.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 프톨레

    마이오스 12세의 둘째 딸로, BC 51년 이후 남동생인 프톨마이오스 13세와 결혼해 이집트를

    공동으로 통치했다. 그 후 왕위에서 쫓겨났으나 BC 48년 이집트에 와 있던 카이사르를 이용해

     

    복위했으며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죽은 뒤에는 막내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재혼해

    이집트를 다스렸다. 카이사르가 암살당하자 그녀는 안토니우스와 정치적 유대관계를 맺고 옥타

    비아누스와 전쟁을 도모했다. 이집트 여왕 자리에 만족하지 않고 로마를 조종해 지중해를 제패

     

    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BC 30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이 옥타비아누스에게 패배함으로써 그녀의 야심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프랑스 철학자

    파스칼은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세게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라고 했다.

    정치적 야심이 가득했던 그녀의 일면을 지적한 말이다. 그녀는 결국 한탄의 말을 남기고 독사에게

    몸을 맡겼다.

     

    ♣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

     

    "더 많은 빛이 들어오도록 창문을 열게! 여기에 좀 더 맣은 빛을...“

     

    18세기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위대한 작가 괴테가 남긴 마지막 말 중 하나다. 독일 출신인 괴테는

    시인이자 작가로서 독일 고전주의 대표자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또 철학과 과학, 정치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으며, 바이마르 공국의 재상으로도 활약했다. 자신의 비련을 소재로 한

     

    소설<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문단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그는 <타소(Torquato Tasso)>,

    <로마 애가(哀歌)>, <빌헬름 마이스터의 도제(徒弟)>, 헤르만과 도로테아 등 많은 명작을 발표했다.

    마침내 세계 문학사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와 <파우스트>를

     

    완성함으로써 위대한 작가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말년에 여러 번 심장 발작을 일으킨 괴테는

    “느낄 수 없는 평온한 상태에서 저 세상으로 인도되길 바란다.” “의사들이 냉혹하게 선고하는 죽음은

    원하지 않는다.” “나는 내 방식대로 죽음을 맞을 것이다.”

    라며 품위 있는 죽음을 갈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ung Amadeus Mozart, 1756~1791)

     

    "내가 이것을 작곡하는 것은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모차르트가 아내 콘스탄체에게 건넨 마지막 말이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작곡가인 모차르트는 천재적인

    음악성으로 성악, 기악, 교향곡 등 다양한 작품을 남겨 하이든과 함께 빈고전파의 양식을 구축했다.

    어려서부터 작곡에 재능을 보인 그는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나’, ‘마적’ 등 수많은 불후의 명곡을 남겼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생활은 더욱더 어려워졌고 친구들에게 진 빚도 점차 많아졌다. 타계 직전까지 빈

    황제 레오폴드 2세로부터 생활비를 얻어 쓰는 궁핍한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활동 당시 그의 천재성을 시기했던 이탈리아 출신의 궁정 음악가 안토니오 살리에리에

     

    의해 수은에 중독되었다는 암살설이 제기됐지만 구체적인 증거는 없는 상황이다. 다만 연구가들은 요도

    이상으로 인한 신부전증이나 매독 치료를 위한 맹독성 금속 사용의 후유증, 육 약화와 우울증 등을 그의

    수명을 단축시킨 원인으로 제기하고 있다. 모차르트는 타계 직전까지 작고한 부친을 염두에 두고 ‘레퀴엠’

     

    작곡에 몰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온에 시달리는 등 병세가 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내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레퀴엠’ 작곡에 심혈을 기울였다고 전해진다. 그의 시신은 3등급으로 분류돼

    마르크스 묘지에 매장되었다. 그 때문에 영혼을 울려주는 주옥같은 음악을 남긴 그의 안식처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실정이다.

     

    ♣ 루드비히 반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친구들이여, 박수치게! 드디어 내가 겪은 희극이 막을 내리게 됐군.

     

    베토벤이 임종을 지켜보고 있는 친구들에게 마지막 한 말이다. 베토벤은 독일 출신의 작곡가로 고전주의

    에서 낭만주의로 넘어가는 시기에 오스트리아 빈에서 주로 활동했다. 음악가였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그는 음악가로서는 사형 선고와 다름없는 청력상실을 극복하고 불후의 명곡을 남겨 ‘고통에

     

    맞선 위대한 작곡가’라는 칭송을 들었다. 청력에 이상이 있음을 알게 된 후 그는 “주변 사람들이 멀리서

    들려오는 플루트 소리를 듣고 있지만 난 들을 수 없다. 그때 나는 삶을 마감하고 싶은 수치심까지 느꼈다.

    하지만 예술은 나에게 살고자 하는 의욕을 부추기고 있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독신을 고수했던

     

    그는 오페라, 소나타, 교향곡 등 많은 작품을 탄생시키는 데 열정을 쏟았다. 그 결과 그의 작품들은 후대

    사람들에게도 깊은 감명을 주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다. 말년에는 청각뿐 아니라

    전립선 질환, 간 손상, 몸이 붓는 수종 등 여러 질환에 시달린 그는 필생의 역작인 ‘교향곡 9번’을 완성하고

     

    3년 뒤에 영면했다. 그는 임종을 앞두고 친구들이 수종과 손상된 간 회복에 도움이 된다는 포도주를 권하자

    “이런, 너무 늦었군.”이라는 농담을 건넸다고 한다.

     

    ♣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

     

    “죽음은 그것이 원하는 대로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순수하고 지성적인

    정신을 아직 유지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나를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다."

     

    독일 단치히 출신의 철학가인 쇼펜하우어는 은행가와 작가인 부모 덕분에 평생 생활고 걱정없이 지냈다.

    단치히가 프로이센에 병합되자 함부르크로 이사한 후 유럽을 여행하기도 했으며 그를 상인으로 만들려던

    아버지가 죽자 괴팅겐 대학에서 철학과 자연과학을 배웠다. 그 후 베를린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쳤으나

     

    헤겔의 명성에 밀려 이듬해 사직했고, 이탈리아를 여행한 후에는 콜레라를 피해 프랑크푸르트암마인으로

    옮겨가 평생을 살았다. 베를린 대학 강사 시절 그는 비관적인 가치관을 주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의

    지적 교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동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고 한다. 게다가 그 즈음에 출간한 <의지와

     

    표상(表象)으로서의 세계>는 거의 팔리지 않았고 헤겔과의 이론 논쟁과 수강생 유치 경쟁에서도 패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철학은 칸트의 인식론에서 출발해 피히테, 셸링, 헤겔 등의 관념론적 철학자를 공격했으나

    종국엔 염세사상으로 귀결된다. 그의 철학은 만년에 이르기까지 주목받지 못했지만, 19세기 후반 염세관의

     

    사조(思潮)에 영합해 널리 보급되었다. 심장병과 간혈적인 발작 증세에 시달려 정기적인 치료를 받은 그는

    역설적이게도 “죽음은 절대적인 무(無)에 도달해야만 행복할 수 있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비관론자답지

    않게 부활을 꿈꾸었던 그는 타인이 자신의 주검을 찾을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는 뜻의 유언을 남겼다.

     

    ♣ 알렉산드르 세르비예비치 푸슈킨(Aleksandr Sergeevich Pushkin, 1799~1837)

     

    나의 죽음 때문에 자책하지 마시오, 이것은 나 혼자 저지른 일의 대가라고 생각하오.“

     

    러시아 작가 푸슈킨이 아내를 놓고 벌인 결투의 후유증으로 눈을 감으면서 아내에게 남긴 말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라는 시로 잘 알려진 푸슈킨은 제정 러시아

    리얼리즘과 근대 문학의 토대를 구축한 문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작품은 농노제의 러시아

     

    현실을 정확히 그려내는 것을 지향했는데, 깊은 사상과 높은 교양으로 일관된 그의 작품들은 ‘러시아

    문학의 모든 작가와 유파(流派)가 모두 푸슈킨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정도로 후대 문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마쳤다. 그는 외무성 공무원으로 재직하던 도중 자유를 노래한 시를 발표한 것이 문제가 되어

     

    러시아 남부로 추방당하는 곤혹을 치렀다. 하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사상적, 예술적으로 한층 더

    성장할 수 있었고, 러시아의 역사적 운명과 민중의 생활 등에 대해 깊히 통찰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서사시<집시>와 시 형식을 빌린 소설 <예프게니 오네긴( Evgenii Onegin)>, 산문으로 된 소설

     

    <대위와 딸> 등 그의 대표작들이 그 결과로 집필 되었다. 특히 <예프게니 오네긴>은 러시아 문학사상

    최초로 리얼리즘의 완성을 보여준 작품으로 당시 러시아 사회의 특징을 남김없이 그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아내 나탈리아를 짝사랑한 프랑스 남작과 결투를 벌이다 총상을 입고 그 후유증으로

     

    젊은 나이에 절명하고 만다. 그 결투는 진보적 사상을 미워하는 궁정 세력이 짜놓은 함정이었다고

    하는데, 어쨌던 아내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담보로 한 대결을 펼치고 죽어가면서도 오히려 아내를

    위로한 그였지만, 나탈리아는 그가 죽은 후 재혼한 것으로 알려졌다.

     

     

    ♣ 찰스 로버트 다윈(Charies Robert Darwin, 1809~1882)

     

    "나는 죽음 앞에서 한 치의 두려움도 느끼지 못한다.“

     

    영국의 생물학자 다윈이 임종 직전에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면서 담담하게 밝힌 말이다. 다윈은 종의

    기원을 통해 생물의 진화론을 내세웠다. 진화론은 생물의 어떤 종(種)의 개체 간에 변이가 생겼을 경우

    그 생물이 생활하고 있는 환경에 가장 적합한 것만 살아남고 부적합한 것은 멸망해버린다는 견해다.

     

    곧 개체 간에 항상 경쟁이 일어나고 자연의 힘으로 선택이 반복되는 결과 진화가 생긴다는 것이다.

    진화론은 공개 당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만큼이나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모든 생물은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기독교 사상에 역행하는 이론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을 포함한 기독교 국가에서는

     

    여전히 진화론을 교육 내용으로 채택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다윈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조물주에

    의한 7일 동안의 창조설은 신화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진화론 역시 인간의 진화를 증명

    하지 못함으로써 여전히 이론으로만 남아 있다. 다윈은 기독교 가치관에 반대하는 논리를 펼쳤지만

    게임브리지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했고 성직자 자격을 취득했다.

     

    ♣ 카를 하인리히 마르크스(Kril Heinrich Marx, 1818~1883)

     

    "살아서 할 말이 별로 없었던 바보 같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 유언 아닌가?“

     

    마르크스가 친구 엥겔스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다. 독일 출신의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였던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혁명가, 과학적 사회주의 이념의 창시자로 잘 알려져 있다. 헤겔의 영향을 받아 무신론적

    자유주의자가 된 그는 엥겔스와 함께 집필한 <독일 이데올로기>로 유물사관을 정립했고 <공산당선언>을

     

    발표해 각국의 혁명에 불을 지폈다. 그는 지구촌에 수많은 마르크스주의자를 양산하면서 프롤레타리아의

    아버지로 추앙받았다. 러시아 10월 혁명을 주도한 불라디미르 레닌은 마르크스 이념의 철저한 신봉자임을

    자처할 정도였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번성하면서 그에 대한 추종 열기는 급격히 식어갔다. 그는 이념 갈등

     

    으로 인해 인생 황금기를 추방과 망명 생활로 소비해야 했다. 게다가 경제적 활동이 거의 없는 관계로 궁핍

    했기 때문에 친구인 엥겔스의 경제적 후원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그의 마지막 10년은 그의 말대로

    만성적인 정신적 침체에 빠져있었으며, 간과 폐 질환으로 최후의 수년 동안 많은 시간을 휴양지에서 보냈다.

     

    아내와 장녀의 연이은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그는 런던 자택에서 평생의 친구이자 협력자인 엥겔스가 지켜

    보는 가운데 일생을 마쳤다.

     

    ♣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ii, 1821`1881)

     

    "내가 오늘 죽을거라는 것이 확실해졌어, 신이시여 나를 이곳에 버려두지 마시오.“

     

    러시아 소설가 도스토옙스키가 최후를 직감하고 한 말이다. 도스토옙스키는 톨스토이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문호다. ‘넋의 이얼리즘’이라는 독자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내면을

    추구해 근대 소설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그는 인간 영혼에 초점을 맞춘 리얼리즘의 대가로 평가받는다.

     

    농노계가 무너지고 자본주의의 질서가 도입되는 정치적 격변기를 체험하면서 시대의 모순에 고민하던

    자신의 모습을 작품에 투영한 그의 문학세계는 20세기의 사상과 문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죄와 벌>,

    <백치>, <카라마조프의 형제> 등은 여전히 불후의 명작으로 꼽힌다. 혈기 왕성한 젊은 시절 그는 과격한

     

    사회주의 운동에 연루돼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총살 직전 황제의 특별사면으로 목숨을 건지고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그 후 그는 공상적 혁명가에서 선비주의자로 사상적 전향을 하는 한편 러시아 정교회의

    독실한 교인으로 탈바꿈한다. 화려한 필력과는 달리 그의 생활은 상당히 어려웠다. 빚 독촉 때문에 4년간

    해외로 도피한 적도 있었다.

     

    ♣ 레프 리콜라예비치 톨스토이(Lev Nikolaevich Tolstoi, 1828~1910)

     

    "이것이 끝이구나, 그런데 농부들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나요?“

     

    폐렴에 걸린 톨스토이가 주치의에게 치료를 받으면서 남긴 마지막 말이다.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문호이자 사상가였던 톨스토이는 백작 가문의 자제로

    태어났지만 어려서 양친을 잃고 친척집에서 성장했다. 인간의 창의적인 생각을 박탈한다는 이유로

     

    대학교를 중퇴하고 잠시 방탕 생활에 빠지기도했던 그는 문학에 천착해 인간의 허위, 가식, 기만

    등을 파헤치는 작품을 발표했다. 그 후 제정 러시아에서 혁명이 준비되고 있는 시기적 조류를 감지

    하고 문학에 러시아 사회 혁명의 정당성을 융합시키고자 했던 그는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리나>,

     

    바보 이반>등 세계 문학사의 한 획을 긋는 명작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 무렵부터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에 대한 無常으로 심한 정신적 동요를 일으킨 그는 과학, 철학, 예술 등에서 해답을 구하려 했으나

    얻지 못했다. 아내의 병적인 히스테리에 오랫동안 시달리던 그는 1910년 10월에 큰딸과 주치의를

     

    데리고 목적 없는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여행 도중 지독한 폐렴에 걸려 아스타포역(현 톨스토이역)

    관사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는다.

     

    ♣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

     

    "부탁이야 울지마, 난 이제 집에 가는 거라고.“

     

    네덜란드 화가 빈세트 고흐가 부모처럼 자신을 돌봐준 동생에게 한 마지막 말이다. 빈센트 고흐는

    서양 미술사를 언급할 때 반드시 거론되는 위대한 화가다. 정신발작에 시달리면서도 죽기 전까지

    ‘감자 먹는 사람들’, ‘해바라기’, ‘빈센트의 방’, ‘별이 빛나는 밤’ 등 수백 편의 그림을 남겼는데 모두

     

    명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생전에는 끝내 인정받지 못하고 죽은 뒤에야 비로소 ‘야수파의

    지표’로 평가받게 되었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본래 성직자의 길을 갈망했지만 광신도적인

    기질과 격정적인 성격 때문에 성직자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실의에 빠진 그는 그림을 그리는

     

    일이 자신을 구원하는 길이라 믿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초기에 그는 하층민의 생활과 풍경을

    주로 화폭에 담았으나, 인상파의 그림을 접한 뒤로 밝은 톤으로 화풍이 바뀌었다. 파리에서 프랑스

    아를로 이주한 후로는 창작에 대한 열정도 남달랐다. 그는 새로운 예술촌 건설을 꿈꾸고 고갱과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성격 차이가 심해 순조롭지 못했다. 정신 발작을 일으킨 그는 고갱과

    다툰 끝에 면도칼로 자신의 귀를 잘라버렸다. 그 후의 생활은 발작과 입원의 연속이었으며 발작이

    없을 때는 그 동안의 공백을 메우기라도 하려는 듯 마구 그림을 그려댔다. 결국 그는 점차 지쳐갔다.

     

    치료를 받고 한때 건강이 회복되어 발작의 불안에서 벗어나는 듯했으나 다시 쇠약해진 그는 우애가

    돈독했던 동생 테오 반 고흐에게 죽음을 예감한 듯한 유언을 남기고 끝내 권총으로 생을 마감했다.

     

    ♣ 마리 퀴리(Muarie Curie, 1867~1934)

    "나의 고통을 덜어 준 것은 약이 아니라 자연의 신선한 공기였다.“

     

    방사능 노출로 인해 건강이 악화된 퀴리가 임종 직전에 딸에게 건넨 말이다.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태어난 마리 퀴리는 프랑스로 건너가 소르본 대학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했다. 그 당시 폴란드

    에서는 여자가 대학에 들어갈 수 없었으므로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힘겨운 유학 생활을 감내해야

     

    했다. 피에르 퀴리와 결혼해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 그녀는 1903년 방사능에 대한 연구 업적을 인정

    받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1911년에는 라듐 및 폴로늄 발견과 라듐의 성질 및 화합물

    연구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이자 물리학과 화학상을 연이어 받은

     

    유일한 인물로 기록된 그녀는 방사능 단위와 원소에 그녀의 이름이 사용되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그녀는 또한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소르본 대학 교수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남편 제자와 염문설을

    비롯해 폴란드 출신 여성이라는 차별적 문제를 극복하지 못해 '화학아카데미' 회원에는 가입되지

     

    못하는 불운을 겪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그녀에 대해 “수학과 물리학 연구자 중에 명성이

    사라지지 않을 유일한 사람”이라고 극찬했다. 라듐과 방사능에 오래 노출되는 실험 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된 그녀는 말년에 스위스 산장에서 자연요법 및 살림욕 치료를 받았지만 결국 고열에

     

    시달리다 타계하고 말았다. 그녀는 사후 60여 년 만인 1995년 남편 피에르 퀴리와 께 여성으로는

    사상 최초로 역대 위인들이 안장되어 있는 파리 팡테옹 신전으로 이장되었다.

     

    ♣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Mohandas Karamchand Candhi, 1869~1948)

     

    “오, 신이시여!”

     

    간디가 예배 장소에서 총을 맞고 쓰러지면서 한 말이다. 간디는 인도의 민족 운동 지도자이자

    건국의 아버지로 불린다. 인도가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는 동안 독립 운동을 선도했다. 그가

    주장한 비폭력, 무저항주의는 인류 역사에 남을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비교적 유복한 상인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런던 대학교에서 법률을 공부해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귀국 후 

    변호사로 활동한 그는 남아프리카연방 여행 중에 인도인들이 차별대우를 받는 것을 보고 인종

    차별 반대 투쟁을 주도해 국제무대에 이름을 알렸다. 다시 인도로 돌아온 그는 출세가 보장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영달보다는 식민지배에 신음하는 조국을 위해 독립 운동을 전개했다.

    영국에 대해선 무저항, 불복종, 비협력주의로 맞섰고 내부적으론 첨예한 갈등을 보인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화합을 시도했다. 하지만 평생 평화 운동을 벌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힌두교

     

    청년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天刑과도 같은 카스트 제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이슬람교

    코란에서 힌두교 진리를 찾는 등 종교의 융합을 추구했던 그는 수많은 청중 앞에서 평상시처럼

    예배를 보다 총에 맞고 쓰러졌다. 인도의 문화 타고르는 그의 주검 앞에 ‘마하트마(Mahatma,

     

    위대한 영혼)’라고 칭송한 시를 받쳤다. 그 후로 ‘마하트마 간디’로 불리게 되었는데 타고르의

    시처럼 그의 위대한 영혼은 인도민족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약소민족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가슴에 총을 맞고 쓰러지면서 외친 그 한마디는 그의 생애를 함축하는 유언이 아닐 수 없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etein, 1879~1956)

     

    "이 세상에서 내가 할 일은 거의 다 한 것 같다.“

     

    아인슈타인이 임종 직전 수양딸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다. 독일 태생 이론물리학자인 아인슈타인은

    유대인 사업가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청소년기부터 수학과 물리학에 취미를 가진 그는 대학에서도

    물리학을 전공했지만 고전물리학에 염증을 느껴 이론물리학자들의 저서를 탐독하면서 혼자 공부

     

    하기를 즐겼다.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가 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고 베른 특허청에서 일하면서

    발명품을 검사하지 않을 때는 항상 물리학을 연구했다. 그는 1905년 빛이 에너지 덩어리로 구성되어

    있다는 광양자설, 물질이 원자구조로 이루어져 있다는 브라운 운동 이론, 물리적 시공간에 대한 기존

     

    입장을 완전히 뒤엎은 특수상대성이론 논문을 발표했다. 그때 발표된 논문들은 단8주 만에 작성된

    것이지만 기존의 인식을 전환시킨 논문으로 평가되었다. 특히 특수상대성이론은 그때까지 지배적

    이었던 갈릴레이나 뉴턴의 역학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았고, 종래의 시간, 공간 개념을 근본적으로

     

    변혁시켰다. 그 후 세계적인 물리학자로 명성을 얻게 된 그는 독일에서 히틀러가 정권을 잡고 유대인

    추방이 시작되자 미국으로 건너가 연구에 매진했다. 그러다 독일이 원자폭탄 연구에 몰두한다는 것을

    알고 몇몇 과학자들과 함께 원자폭탄을 가져야 하는 필요성을 역설한 편지를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냈다. 이것이 미국 원자폭탄 연구의 시초가 되었다. 1921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그는 특이한

    외모와 체면을 세우지 않는 행동 등으로 주목을 끌었다. 바이올린 연주에도 상당한 재능을 보였으며

    마릴린 먼로의 추파를 받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종전 후에는 세계 평화 운동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던

    그는 간 질환으로 오랜 기간 시달리다 타계했다.

     

    ♣ 마릴린 먼로(Marilyin Monroe, 1926~1962)

     

    "대통령에게 안부를 전해주세요, 당신에게도 안부를 전해요.

    그대는 좋은 사람이니까요, 다시 만나요, 다시 보자고요.“

     

    마릴린 먼로가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처남이자 영화배우인 피터 러슨에게 한 말이다.

    할리우드가 배출한 최고의 배우 중 한 명인 먼로는 가출한 아버지와 정신병자인 어머니로

    인해 보육원과 고아원을 전전했다. 생계를 위해 모델과 단역 배우로 일하기도 했던 그녀는

     

    불우했던 과거를 극복하고 영화 ‘나이라가라’에서 주연을 맡아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 후 그녀는 ‘신사는 금발을 좋아 한다’, ‘돌아오지 않는 강’, ‘7년 만의 외출’, 왕자와 무희‘,

    ’버스 정류장‘, ’뜨거운 것이 좋아‘ 등에 출연하면서 세계적인 섹스 심벌로 자리 잡았다.

     

    아름다운 금발과 푸른 눈, 전신에서 발산하는 독특한 성적 매력이 그녀를 순식간에 세계적인

    스타의 자리에 올려놓은 것이다. 하지만 세 번의 결혼 실패, 존 F, 케네디 대통령과의 스캔들,

    우울증 등, 그녀의 사생활은 불운했다. 할리우드라는 거대한 톱니바퀴에 이끌려 약물 중독이

     

    되었고 결국엔 자살로 보이는 의문의 죽음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녀는 섹스 심벌 이미지와는

    달리 상당한 교양과 필력을 갖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평소 톨스토이, 휘트먼, 밀턴

    등의 작품을 애독할 정고로 독서광이었으며 베토벤 음악에도 상당한 수준의 심미안을 갖고

    있는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 체 게바라(Che Guevara, 1928~1967)

     

    "당신이 날 죽이러 왔다는 것을 알고 있소, 떨지 말고

    그냥 방아쇠를 당기시오. 당신은 단지 사람 한 명을 죽이는 것뿐이오.“

     

    마리오 테란 하사관이 총구를 겨누자 체 게바라가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한 말이다. 제 3세계권

    혁명 운동의 상징적인 인물로 기억되고 있는 체 게바라는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과테말라와 볼리비아를 거쳐 멕시코에 머무는 동안 쿠바 혁명의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와

     

    그의 동생 라울 카스트로를 만나 쿠바 혁명에 뛰어들었다. 카스트로가 정권을 잡은 후에는 쿠바 시민이

    되어 국가토지개혁위원회 위원장, 중앙은행 총재, 공업부 장관 등을 역임하며 ‘쿠바의 두뇌’로 불리면서

    쿠바 정권의 기초를 세워나갔다. 그 후 돌연 쿠바의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 그는 아프리카 콩고에서 그의

     

    혁명 동지들과 함께 활동하며 혁명 게릴라들의 국제주의 전선을 도모했다. 하지만 콩고 좌파 세력들의

    쿠바인 철수 요구로 성과 없이 아프리카를 떠난 그는 볼리비아의 산악 지대에서 게릴라 부대를 조직해

    라틴아메리카 전체의 혁명을 계획하고 추진해나갔다. 그러자 중남미에서 공산주의 세력이 확산되는 것을

     

    염려한 미국은 볼리비아 정부군과 함께 대대적으로 게릴라 소탕 작전을 펼쳤다. 그는 산악 지대를 이용한

    게릴라 전술로 맞섰지만 미국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1967년 10월 마침내 볼리비아 정부군에게 사로

    잡힌 그는 허름한 학교에 임시 수감됐다가 곧바로 마리오 테란 하사관에 의해 처형되었다. 그의 유해는

    총살당한 지 30년 후에 볼리비아의 공동묘지에서 발견되어 쿠바 산타클라라 시의 기념관으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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