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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실이 빠지면서 드라마 ‘선덕여왕’이 시들해졌다고들 한다. 여흥을 돋우는 미실은 한국 최초의
기생이랄 수도 있기 때문에, 신라 24대 진흥왕 때에 여무(女巫) 직능의 유녀화(遊女化)에 따른
화랑의 원화(源花)에서 기생이 발생했다는 설이 있다. 신라에서는 풍류도가 유행했고, 화랑은
산천경개 좋은 곳을 찾아 한 풍류하던 이들이었으며, 무술은 물론 정신수련도 병행하여 접신의
이쪽저쪽을 왔다갔다 했다. 화랑들이 목숨 바쳐 충성하던 원화 혹은 국선은 풍류도의 우두머리로,
지금으로 치자면 무당 혹은 기생쯤이다. 흔히 노래, 춤, 그림, 글씨, 시문 따위의 예능을 익혀 손님을
접대하는 기생을 일러 예기(藝妓)라 한다. 말귀 알아들으면 해어화(解語花), 노래 잘 하면 가기(歌妓),
악기 잘 다루면 현기(絃妓), 한 얼굴하면 가기(佳妓), 나이 지긋하면 장기(壯妓), 한물 가면 퇴기(退妓).
몸 파는 창기(娼妓) 혹은 천기(賤妓)는 드물었다. ‘소리는 전라도요, 춤은 경상도라‘ 어떤 단어가 연상
되는지, 인력거를 탄 미모의 여인, 화려한 옷, 그리고 뽀얀 분화장, 바로 기생이다. 시와 서, 기예에
능해야만 기생이 될 수 있었다. 그 화사함 속에 지조를 꼿꼿이 세운 여인들의 이야기가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임금도 나를 소유하지 못한다고 큰 소리쳤던 보천 기생 가희아, 한 세상 다 가져도 가슴에는
한 사람만 있다고 한 영흥 기생 소춘풍, 물결이 마르지 않는 한 혼백도 죽지 않으리라고 일갈한 진주 기생
논개 등등, 조선시대 기생은 사회적으로 천대받았던 계급이었지만, 교양인으로 대접받았던 특이한 직업
이었다. 이들이 없었다면 전통 문화의 한 축이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창이나 한국무용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승무 살풀이 태평무 등은 이들에 의해 전승돼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생의 이미지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퇴색돼 창기나 작부 취급을 받게 된 것은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한일합방 이후
조선기생청이 문을 닫자 생긴 것이 권번(券番)이다. 기생들이 기적을 뒀던 조합인데 검번(檢番) 또는
권반(權班)으로도 불렀다. 혹독한 시대 상황에서도 기생들은 품위와 긍지를 잃지 않았다. 권번은 한성을
시작으로 평양, 부산, 진주, 대구, 광주, 남원, 개성, 함흥 등에도 속속 생겼고 부산에서는 동래권번이
대표적이다. 당시 동래 기생은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쳤는데 ‘평양 기생 치마폭은 벗어나도 동래 기생
치마폭에는 묻히고 만다.’는 말까지 나돌 정도였다. 동래권번 출신으로 부산이 ‘마지막 예기’로 불리는
유금선 선생(부산 무형문화재 제3호, 동래학춤 구음 예능보유자)이 지난 7일 민족미학연구소가 주최한
‘숨은 예인 한마당’에 나와 부산 동래의 소리를 들려줬다. 1929년생으로 내일모레면 여든인 그녀는 학춤과
짝놀음 한 구음, 구음(口音)이란 '입타령' 다시 말해 전통악기 소리를 흉내내는 국악의 한 부분이다.
악기 소리를 입으로 대신한다고 한나 그 속에 흐드러진 감정이 녹아있고 절절함이 묻어난다.
부산 춤의 명인 김진홍과 부산 아쟁의 명인 박대성의 몸짓과 가락에 곡진한 소리를 얹었다.
그곳에서 부산 문화의 원화(源花)가 피어오르고 있다.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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