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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해안 대진, 강구
    일탈/가보고 싶은 곳 2009. 2. 16. 10:03

     

    《바다, 나는 결국 네게로 왔다. 너는 갖가지 모습으로 나를 손짓하고 수많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는

    그 바닷가에 오랫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거센 해풍은 끊임없이 파도를 휘몰아 바닷가의 바위를 때리고

    사장을 할퀴었다. 허옇게 피어오르는 물보라와 깜깜한 하늘 끝에서 실려 온 눈송이가 무슨 안개처럼 나를

     

    휩쌌다.…광란하던 그 바다, 어둡게 맞닿은 하늘, 외롭게 날리던 갈매기, 사위어가던 그 구성진 울음, 그리고

    그 속에서 문득 초라하고 왜소해지던 내 존재여, 의식이여. …돌아가자. 이제 이 심각한 유희는 끝나도 좋을

    때다. 갈매기는 날아야 하고 삶은 유지돼야 한다. 갈매기가 날기를 포기했을 때 그것은 이미 존재가 아니다.

     

    받은 잔은 마땅히 참고 비워야 한다. 절망은 존재의 끝이 아니라 그 진정한 출발이다.
                                -<이문열의 소설 ‘그해 겨울’(젊은 날의 초상 3부)에서>》

    ♣ 푸짐한 대게와 집채만한 파고


    소설 ‘그해 겨울’의 주인공 영훈은 스물한 살의 대학생이다. 그는 밑도 끝도 없는 절망감과 세상살이의 부질없음에 진절머리를 친다. 까닭 모를 허무감

    에 자신을 끊임없이 학대한다. 결국 그는 죽기 위하여 그해 겨울 동해 바다

     

    를 향해서 떠난다. 가방엔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는 내용의 유서와 약병이 들어있다. 바다까지는 이백여 리 사흘 길. 삼십 년 만의 폭설도 그에겐 관심 밖이었다. 그는 마침내 눈이 두 자가 넘게 쌓인 창수령을 넘는다.

     

    손에 들고 다니던 가방은 새끼로 묶어 등짐을 었다. 다리에는 고무줄로

    감발을 쳤다. 그는 고갯길을 걷는 동안 내내 꿈을 꾸는 듯하다. 그 황홀하

    고 장엄한 아름다움에 숨이 멎는다. 적어도 그 순만큼은 죽음의 유혹을

     

    잊는다. ‘창수령(蒼水嶺), 해발 칠백 미터. 아아, 나는 아름다움의 실체를

    았다. 창수령을 넘는 동안의 세 시간을 나는 아도 영원히 잊지 못하리라.…오, 아름다워서 위대하고 아름다워서 숭고하고 아름다워서 신성하던 그

     

    모든 것들….’창수령은 첩첩산골인 경북 영양군 무창리와 동해안의 영덕군

    창수리를 잇는 낙동정맥 고갯마루다. 이곳 사람들은 ‘자래목이재’라고도

    부른다. 거리는 3.5km 정도. 지금은 아스팔트로 말끔하게 덮여 승용차로

     

    순식간에 휘익 지나칠 수 있다. 고개 넘어 20분이면 곧바로 영덕군 영해면

    대진해수욕장에 닿는다. 소설엔 사람을 죽이러 대진 바다에 가는 사람도

    나온다. 칼갈이 중년 사내. 그는 19년 동안의 옥살이를 마치고 자신과 동료

     

    를 밀고한 배반자를 죽이기 위해 칼을 갈며 가고 있었다. 주인공 영훈은

    그와 고개 아래 주막집에서 마주쳤지만 그는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그러나 영훈이 허기와 추위로 눈밭을 헤맬 때 그 사나이는 영훈을 구해준

     

    말한다. “어쩌면 거기서(대진) 자네와 나는 정반대의 일을 할 것 같군.” 창수령에서 낙동정맥 잔등을 타고

    1시간 30분 정도(4km) 남쪽으로 걸으면 울치재가 나온다. 울치재(서읍령·西泣嶺·해발527m)도 내륙 산간인

    경북 영양(양구리)과 동해안 경북 영덕(창수리)을 잇는 고갯길이다. 조선시대 과거 보러 가던 선비이 넘던 길

     

    이다. 영해∼영양∼안동∼문경새재를 통해 한양에 이르렀다. 영해도호부가 있을 땐 한양에서 내려오는 관리

    들도 이 고개를 밟으며 부임했다. 소설 속의 창수령 분위기를 느끼려면 요즘엔 울치재를 넘어야 한다. 2.8km

    비포장 길로 호젓하고 아름답다. 눈 오는 날이라면 더욱 안성맞춤이다. 굽이마다 마른 나뭇잎이 켜켜로 쌓여

     

    있다. 그늘엔 잔설이 숫눈으로 덮여있다. 소설 속의 ‘눈 덮인 봉우리의 장려함, 푸르스름하게 그림자 진 골짜

    기의 신비, 쌓인 눈으로 가지가 찢긴 적송의 처절한 아름다움, 참나무 줄기의 억세고 당당한 모습, 떡갈 등걸

    을 검은 망사가리개처럼 덮고 있던 계곡의 칡넝쿨, 다래넝쿨’을 볼 있다. 대진해수욕장은 덕천해수욕장

     

    고래불해수욕장과 죽 이어져 있다. 세 곳을 합하면 백사장 길이가 약 5km나 된다. 겨울 백사장은 막막하다.

    마른 나뭇가지가 밀려와 쌓여 있다. 바람꽃이 활짝 피었다. 회색 갈매기들은 끼룩∼끼룩∼ 바람을 타고 너울

    너울 오르내린다. 파도가 부풀어 오르면 갈매기들도 까르르 웃으며 딱 그만큼 날아오른다. 파도와 온종일

     

    고무줄 놀이를 한다. 저 멀리 고깃배들도 출렁인다. 언뜻 바다와 맞닿은 하늘의 구름 떼가 울렁인다. 파도는

    일렬횡대로 몰려온다. 1차는 낮은 포복으로, 2차는 찔러 총 자세로, 3차는 “돌격 앞으로”를 외치며 달려온다.

    4차 파도는 아예 검은 탱크처럼 으르렁거리며 밀려온다. 바다는 해안으로부터 멀리 갈수록 고등어 등처럼 짙

     

    푸르다. 요즘 영덕 동해안 길은 온통 대게 천지다. 강구는 은어로 이름난 오십천과 동해가 만나는 포구다.

    맞은편 삼사리엔 해상공원있다. 강구는 고깃배와 횟집으로 가득하다. 광어 우럭뿐 아니라 요즘 잡히는

    밀치 게르치(놀래미 종류) 회도 맛볼 수 있다.  강구에서 병곡의 고래불해수욕장까지는 걷기에 으뜸이다.

     

    국가지원도로 20호선을 따라 걸을 수 있기 때문, 파도 갈매기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오징어 말리는 것을 볼

    수 있고 바다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약 40km 거리. 아침 일찍 나서면 하루에 마칠 수 있다. 병곡면에서

    울진군 후포면까지 약10km 는 국도 7호선을 따라 갈 수밖에 없다. 동해안 길은 이런 식이다. 군데군데 7호

     

    선과 국지도가 만났다가 갈라진다. 국도 7호선은 강원 고성까지 이어지는 동해안 길, 하지만 걷기엔 아무래도

    위험하다. 해안가와 멀리 떨어진 곳이 많다. 가드레일에 막혀 바다와 숨바꼭질 하듯 언뜻언뜻 봐야 한다. 어부

    들의 정겨운 사투리도 듣기 쉽지 않다. 경정리 에는 창포말 등대와 풍력발전단지가 있다. 창포 해안엔 아낙네

     

    들이 청어 과메기 말리기에 한창이다. 바닷바람에 꾸덕꾸덕하게 말리기 위해 청어 배 속을 따내기에 바쁘다. 

    갈매기 떼가 버린 청어 속을 먹느라 왁자지하다. 청어 알은 부침개나 김치찌개로 먹거나 젓갈을 근다.

    소설 주인공 영훈과 칼갈이 사내는 대진 바다에서 또 마주친다. 영훈은 자살에 실한다. 오히려 그의 근육은

     

    있는 힘을 다해 그를 바닷물에서 모래밭으로 끌어냈다. 깨닫는다. 절망이야말로 가장 순수하고 치열한 정열이

    구원이라는 것을. 진실로 예술적인 영혼은 아름다움에 대한 철저한 절망 위에 기초한다고. 그는 유서

    병을 힘껏 바다로 던져버린다. 그것들은 파도에 휩쓸려 사라졌다. 사내는 “뭘 던졌나?” 하고 묻는다. 영훈은

     

    대답한다. “감상과 허영을요. 익기도 전에 병든 지식을요.” 칼갈이 사내도 배반자를 죽이려 갈고 갈았던

    시퍼런 칼을 바다를 향해 힘껏 던져 버린다. 칼은 순식간에 바닷물 속으로 잠겨버렸다. 그는 말한다. “내 오랜

    망집(妄執)을 던졌다. 놈은 쓰러져가는 오두막에서 죽어가는 아내와 부스투성이 남매를 데리고 살고 있었다.

    그대로 살려두는 쪽이―더 효과적인 처형이었지….”

     


                                                                               출처~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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