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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사임당
    평산 신씨/평산 신씨네 2010. 1. 17. 12:20

    겨레의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 1 5 0 4 ~1 5 5 1)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호는 사임당(師任堂:思任堂:師妊堂), 시임당(媤妊堂), 임사재(任師齋)이다.

    강원도 강릉(江陵) 출생이며, 율곡 이이(李珥)의 어머니이다. 효성이 지극하고 지조가 높았으며 어려서부터

    경문(經文)을 익히고 문장, 침공(針工), 자수(刺繡)에 능했으며, 특히 시문(詩文)과 그림에 뛰어나 여러 편의

     

    한시(漢詩) 작품이 전해진다. 또한 안견(安堅)의 영향을 받은 화풍(畵風)은 여성 특유의 섬세 정묘함을 더하여

    한국 제일의 여류화가라는 평을 듣는다. 산수(山水),·포도,·풀,·벌레 등을 잘 그렸다. 자녀교육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 현모양처(賢母良妻)의 귀감(龜鑑)이 되었다.

     

    ◈ 사임당의 생애

     

    1504년 10월 29일 강릉 북평촌(北坪村-지금의 오죽헌)에서 아버지 평산 신씨, 신명화공과 어머니 용인 이씨 사이에서

    둘째 딸로 태어났다. 외가에서 태어난 신사임당은 어머니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의 각별한 사랑과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어 세종 때 유명한 화가, 안견(安堅)의 그림을 본받아 산수, 풀벌레, 포도, 매화 등 여러 가지

     

    그림을 공부하였다. 타고난 총명함에다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교육에 힘입어 유교경전은 물론 글씨와 문장, 바느질과

    자수에도 능했다. 1510년(중종 5년). 7세 어려서 외조부 이사온이 교훈과 어머니의 훈도 아래서 자랐다. 안견의 화풍을

    받아 산수, 포도, 풀벌레 등 그림을 공부하기 시작했으며 유교의 경전에 통하고 글씨와 문장에도 능할 뿐 아니라 자수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이다.

     

    *1516년(중종 11년). 13세

    부친 신명화공이 진사 시험에 오르다.

     

    *1522년(19세)

    덕수이씨 원수와 혼인하였다. 이 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1524년(21세)

    서울에서 맏아들 선(璿)을 낳았다. 그 후 사임당은 파주, 강릉, 봉평 등지로 옮겨 다니며 생활하였다.

     

     

    *1529년(26세)

    맏딸 매창(梅窓)을 낳았다

     

     

    *1530년(27세)

    둘째 아들 번(璠)을 낳았다.

     

     

    *1534년(31세)

    둘째 딸을 낳았다.

     

     

    *1536년(33세)

    한 선녀가 살결이 눈부시게 희고 오색 광채가 나는 옥동자를 사임당의 품속에 안겨 주는 태몽을 꾼 지

    열 달 만에 찬란히 빛나는 검은 용이 동해바다에서 침실로 날아드는 꿈을 꾸고 율곡 이이를 낳았다.

     

     

    *1541년(38세)

    강릉 친정에서 서울로 가던 중, 대관령 중턱에서 홀로 계신 어머니를 그리는 시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을 지었다.서울로 올라온 후 시댁의 모든 살림살이를 관장하였다.

     

     

    *1542년(39세)

    넷째 아들 우(瑀)를 낳았다. 우는 어머니 사임당을 닮아서 시, 서, 화, 거문고에 뛰어났다. 후에 우리나라

    초서의 대가로 불리는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의 사위가 되었다.

     

     

    *1550년(47세)

    남편 이원수공이 지방으로부터 나라에 조세로 바치는 곡식을 서울로 실어 나르는 선박관련 업무를 맡은

    수운판관(水運判官)이 되었다.

     

     

    *1551년(48세)

    5월 17일 별세하였다. 파주 두문리 자운산에 묻혔다.

     

     

    ※ 작품으로 시(詩)에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 《사친(思親)》 등이 있고,

    그림에 《자리도(紫鯉圖)》 《산수도(山水圖)》 《초충도(草蟲圖)》 《노안도(蘆雁圖)》

    《연로도(蓮鷺圖)》 등이 있다.

     

    ♣ 사임당의 글씨와 그림

     

      사임당은 그림과 글씨에 뛰어났다.

      사임당의 예술적 재능에 대한 첫 번째

      언급은 율곡 이이가 쓴 <선비행장>에서 찾을 수 있다.

      다음 구절은 사임당이 다재한 인물이었음을 잘 말해 준다.

     

     

      어릴 때부터 경전에 통달하고 글을 잘 지었으며 글씨와 그림에 뛰어났고,

      또 바느질에 능해서 수놓은 것까지도 정묘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중략)

      평소에 그림 솜씨가 비범하여 일곱 살 때부터 안견의 그림을 모방하여

     

      산수화를 그렸으며 또 포도를 그렸으니, 모두 세상에서 견줄 만한 이가

      없었다. 그 그림을 모사한 병풍과 족자가 세상에 많이 전한다.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할 구절은 ‘산수화와 포도도가 세상에서 견줄 만한 이가

     

    없었다.’이다. 어머니를 대상으로 쓴 행장이므로 아들의 주관이 배제되었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그렇다고 하여도 이 기록을 통해 신사임당의 예술적 재능이 남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시·서·화로써 자신의 재능을 표현한 여성은 많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재능을 시와 그림,

     

    글씨로 표현해 낸 사임당은 남다르다. 현재 전하는 산수도와 포도도는 여느 문인화가나 화원이 그린 그림에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따로 스승을 두거나 체계적인 학습을 통해 획득한 재능이 아니라

    스스로 공부해 얻은 결과물이기에 더욱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사임당은 초충도 그림으로 유명하다. 사람들이 사임당이 그린 다른 화목의 그림보다

      특히 초충도를 많이 기억하는 것은 그림의 소재가 주는 평이함 때문일 것이다.

      초충도는 풀과 벌레그림이다. 좀더 큰 의미로는 꽃을 피우는 식물과 날벌레와 길벌레에

     

      개구리, 도마뱀, 쥐를 포함시킨 그림을 일컫기도 한다. 이처럼 초충도의 소재는 우리가 

      집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물과 벌레들로 구성된다. 오이, 수박, 가지, 맨드라미·

    양귀비, 원추리, 봉선화 등의 식물과 나비, 벌, 메뚜기, 여치, 방아깨비, 쇠똥벌레 등의 벌레가 그것이다.

     

     

      특히 소재로 사용된 식물들은 대부분 다산을 상징하는 것들이어서 초충도는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소재를 화폭에 담았다는 친근성 외에도 가문의 번창과 자녀들의 입신

      양명 같은 상징성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보통 저지 바탕에 그려진 수묵채색화로서

     

      기존의 수묵화나 수묵담채화보다 색감이 더욱 도드라진다는 점에서도 이색적이다.

     

     

    ♣ 후세 사람들이 말하는 신사임당

     

    *숙종(1661~1720)

    사임당의 초충도첩이 경은부원군 김주신(숙종의 장인)의 집에 있었다. 어느 날 숙종이 가지고 오라 하여

    똑같이 그리게 한 다음, 그림으로 병풍을 만들어 치고 원본은 시를 지어 함께 되돌려 보냈다.

     

    '풀이랑 벌레랑 실물과 똑 같구나

    부인의 솜씨인데 이같이 묘하다니

    하나 더 모사하여 대궐 안에 병풍을

    쳤네 아깝구나, 빠진 한 폭 다시 하나

    그릴 수밖에 채색만을 썼는데도

    한층 아름다워 그 무슨 법이런가

    무골법이 이것일세.'

     

    *이숙권(16세기)

    사임당은 어려서부터 그림을 공부했는데 포도와 산수그림은 절묘하여 평하는 사람들이 세종 때 유명한

    안견이란 화가에 버금 간다고 한다. 어찌 부녀자의 그림이라 해서 가볍게 여길 것이며, 또 어찌 부녀자에게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나무랄 수 있겠는가?”

     

    *정호(1648~1736)

    옛날 성현들은 인물을 평가함에 있어 도덕이 온전하고 재주가 갖추어진 사람을 일컬어 군자라 했다.

    그러나 이 말은 남자에게는 해당되나 부인에게는 상관이 없는 말이다. 남들은 여자란 다만 도덕은

    말할 수 있어도 재주는 말할 것이 못된다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여자라도 덕이 이미 온전히

    갖추어졌고, 재주도 통하지 않음이 없다 하면 어찌 여자라하여 군자라 일컫지 못하겠는가! 사임당은

    여자 중의 군자라 일컬어 손색이 없을 것이다. 큰 인물을 낳고 길러 꽃다운 이름을 백대에 끼쳤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김진규(1658~1716)

    사임당이 그린 풀, 벌레, 나비, 꽃, 오이 따위는 그 모양이 실물과 똑같을 뿐만 아니라 그 빼어나고 맑은

    기운이 산뜻하여 화폭 속에 마치 살아있는 것 같아 그저 붓이나 핥고 먹이나 빠는 저속한 화가 따위가

    능히 따를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권상하(1641~1721)

    사임당 신부인의 그림은 필력이 살아 움직이고 모양을 그린 것이 실물과 똑 같아, 줄기와 잎사귀는 마치

    이슬을 머금은 것 같고, 풀벌레는 살아 움직이는 것 같으며, 오이와 수박은 보고 있노라면 저도 몰래 입에

    침이 흐르니, 어찌 천하에 보배라 하지 않으리요!”

     

    *홍양한(18세기)

    그림으로써 세상에 드러난 이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그 모두는 남자요, 부인은 극히 드물다. 더욱이 

    잘 그리는 사람은 많아도 신묘한 경지에 들어간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부인으로서 그림을 잘 그려

    신묘한 경지에까지 들어간 분이야말로 우리나라에서는 오직 사임당 신씨뿐이다.”

     

    *신석우(1805~1865)

    사임당 신씨 부인은 타고난 자질이 맑고 고운 데가 효성이 지극하였을 뿐만 아니라 몸가짐이 단정하고

    순결하며 말이 적고 행실이 바른 분이셨다. 또 경전과 사기에 통하고 문장에도 뛰어났으며, 바느질과

    자수에도 신비에 가까울 정도였다. 더욱이 그림에 있어서는 신품을 만들어 냈다. 이 모두를 종합해 볼 때

    사임당은 여류 선비가 분명하므로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 간절하다.”

     

    *오진영(1940년)

    사임당 신씨 부인의 천재는 ‘바로 나면서부터 안다’는 것에 가깝다. 왜냐하면 문학, 예술 등의 방면에 있어

    모두 배우지 않고 스스로 터득하였기 때문이다. 일찍이 남에게 나타내 보이지 않았으며, 평생의 언행이

    어디에 가든지 중국의 이름난 임금인 문왕의 어머니 태임과 같았다. 그리고 단정하고 순일하고 진실하며

    장중한 점은 비교할 사람이 없다.”

     

     ♣ 오만원권 화폐 인물로 사임당 선정

    *여성들의 자긍심이 고조됩니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남성과 여성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굴러갑니다. 우리나라 화폐 모델이 모두 남성인 이때,

    여성이 새 화폐의 주인공으로 선정됨으로써 역사를 견인하는 양성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돼, 여성들의 자긍심은 훨씬

    고조될 것입니다. 따라서 여성 중 가장 비중 있고, 견실한 지명도를 가지고 있는 사임당이 모델로 선정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성실하게 살았던 모든 여성의 삶은 존중받아야 합니다

    역사에 기여한 인물 중에는 남성이 많습니다. 여성의 사회활동이 제한된 조선시대에 상대적으로 남성의 사회적 역할이

    컸던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근대 이전의 우리나라 여성들이 자신의 책무를 게을리 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사회적

    활동을 제한 당하다 보니 그 역할의 폭이 가정에 한정될 수밖에 없었던 것인데, 사임당의 경우, 당대의 가족제도 속에서

    딸로서의 역할, 아내로서의 역할, 나아가 부모로서의 역할 중 그 어느 것도 소홀히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 모든 역할을

    충실히 하면서 자신의 능력과 소질을 개발하여 많은 작품을 남기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니 성실하게 살았던 모든 여성의

    삶은 존중받아야 마땅합니다.

     

    *대표성과 역사성을 가지고 있는 친숙한 인물입니다

    사임당은 표면적으로 화려한 경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던 성실한 개인이자 자신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한 인물입니다. 그런 이유로 오랫동안 존경받았고 또한 계속 존경의 대상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사임당은 우리 역사에 대표적 인물이자 친숙한 인물, 나아가 여성의 덕목을 가장 잘 구현한 인물, 칠남매를 훌륭하게

    키운 인물입니다.

     

    *여성으로서의 역할과 의무에 충실했다면 훌륭한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사임당이 지극히 여성적인 삶을 산 인물이기 때문에 화폐의 도안인물로 선정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여성적인 삶을 살았다는 이유로 거부한다면 그것은 곧 모든 여성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입니다. 개인을,

    나아가 사회를 변화 시킬만한 개혁적인 인물은 마땅히 중요한 평가를 받아야겠지만 여성으로서의 역할과 의무에

    실했다면 그것으로 훌륭한 평가를 받을 수 있어야 온당합니다.

     

    *자신의 재능을 스스로 개발한 적극정을 지녔습니다

    사임당은 따로 스승을 두지도 않았고 체계적인 학습을 받지도 않았지만 스스로 능력을 개발하였습니다. 후대에 많은

    역사적 인물들이 사임당의 재능을 격찬하였는데 이는 주어진 환경을 극복하고 그것을 예술로 승화시킨 적극적 능력을

    높이 산 때문입니다. 사임당은 자신의 재능을 개발하여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한 적극적인 인물로 21세기 여성이라면

    누구나 본받을 만한 귀감이 됩니다.

     

    그림과 시(詩)

       

         산 매자 꽃이 환히 밝지 않은가

         지금 세상사람 중에서 형제만한

         이가 또 있는가. 죽음의 마당에서

     

         형제는 간절히 생각하며 송장이

         쌓인 들판에서도 형제는 서로

         찾는 도다. 들에 있는 할미새가

     

         바삐 날 듯 형제는 위난을 급히

         구하는 도다 매양 좋은 벗이

         있으되 이럴 땐 길게 탄식할

     

         뿐이로다. 형제는 울안에서

         싸우다가도 밖에선 업신 여김을

         함께 막는 도다 비록 좋은 친구가

     

         있다 하여도 누가 우리를 도와

         주리오. 맛있는 음식을 늘어 놓고

         취하도록 술을 마신다 하여도

     

         형제가 갖추어 있어야 화락하고

         또 아내와 아들이 뜻이 맞아

         거문고와 비파가 어울림 같다

     

         하여도 형제가 한자리에 모여

        있어야즐겁고 또 기쁨이 길지니라.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

     

         어머님 그리워

         산이 겹친 내 고향은

         천리련 마는자나깨나

     

         꿈속에도 돌아 가고 파

         한송정(寒松亭) 가에는

         외로이 뜬 달

     

         경포대(鏡浦臺) 앞에는

         한줄기 바람 갈매기는

         모래위로 흩어졌다

     

         모이고 고기 배들은

         바다위로 오고 가리니

         언제나 강능길 다시

     

         밟아가 색동옷 입고

         앉아 바느질할고

         늙으신 어머님을

     

         강능에 홀로 두고

         외로이 서울 길로

         가는 이 마음

     

         돌아보니 북촌(北村)은

         아득도 한데

         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

     

     

    신사임당 동상

     

    1504년 음력 10월29일 강릉 북평촌에서 평산신씨 신명화공의

    다섯 딸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모든 여성의 사표로 덕과 학문,

    예능을 고루 갖춘 여류문인이자 화가, 서예가로 우리겨레의

    영원한 어머님이자, 우리 역사상 가장 모범적인 현모양처이다!

     

                                                              강릉 오죽헌, 시립 박물관, 가훈전당, 우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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