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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공 신익희
    평산 신씨/평산 신씨네 2010. 1. 3. 16:46

     ◈ 海公 신익희(申翼熙) 선생

     

    *1894. 6. 9~1956. 5. 5

    *1919.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정 기초위원 이후

       임시정부 법무총장, 임시의정원 부의장 등 역임

    *1935. 민족혁명당 창당에 참가

    *1937. 조선민족전선연맹 결성에 참여

                                   *1941. 임시정부 외교연구위원회 위원

     

    나라는 반드시 완전 독립되어야 하고(國家須完全獨立)

    민족은 반드시 철저 해방되어야 하며(民族須澈底解放)

    사회는 반드시 자유 평등하여야 한다(社會必須平等)

     

    - 조국광복을 앞둔 1945년 중국에서 쓰신 글 중에서 -

     

    선생은 1894년 6월 9일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草月面) 서하리(西霞里)에서 평산 신씨(平山申氏)

    장례원경(掌禮院卿) 단(檀)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의 호는 해공(海公), 중국 망명중에

    사용하신 이명(異名)은 왕해공(王海公) 혹은 왕방오(王邦午)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5세 때

     

    백형(伯兄) 규희(揆熙)에게 한학을 수학하였는데, 특히 글을 잘 써 9세 때에는 학부대신을 지낸

    이도재(李道宰)로부터 지필묵(紙筆墨)을 상품으로 받기도 하는 등 명필가의 자질을 보였다. 1908년 상경하여 관립 한성

    외국어학교 영어과에 입학하였다. 당시 우리 나라는 1905년 11월 「을사늑약(乙巳勒約)」에 의해 국권이 침탈되더니,

     

    이어 1907년 7월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으로 군대까지 해산 당하는 등 일제의 식민지나 다름 없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선생은 일제로부터 국권을 되찾고 민족적 수모를 설욕하는 방법은 서구의 진보한 문명을 수용하여 나라를 부강

    하게 하는 것임을 깨닫고 영어과를 선택하였다. 그리하여 호조참판을 지낸 이위(李暐)의 집에서 가정교사로 학비를

     

    조달하여 가면서 1910년 한성외국어학교를 졸업하였다. 하지만 조국의 운명은 나날이 쇠락하여 가더니 결국 선생이

    한성외국어학교를 졸업한 해에 일제의 완전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이같은 망국의 상황에 당면하여 선생은 역설적으로

    일본유학을 꿈꾸게 된다. '우리는 현실을 직시,정시하여야 한다. 우리가 구적(仇敵)을 몰아내고 나라를 도로 찾는 데는

     

    부질없이 감상에만 흐르지 말고, 현대로 개화 진보한 일본에 가서 배워 그 놈을 이기고 일어서야 한다.'고 하는 극일(克日)

    의 심정으로 선생은 일본 유학을 단행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1912년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정치 경제학부에 입학한

    선생은 독립운동에 전위가 될 유학생들을 결속시키는데 주력했다. 정세윤(鄭世胤)․송진우(宋鎭禹)․문일평(文一平)․안재홍

     

    (安在鴻) 등과 협의하여 유학생의 통일조직으로 학우회(學友會)를 조직하고 총무․평의회 의장․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그 기관지로 발행된 '학지광(學之光)'의 주필․총무 등을 맡아 유학생들은 물론 국내 청년 학생들의 민족정신과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특히 1913년에는 동지들과 단지(斷指0하여 피를 나누어 마시면서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하였다고 하니 이 당시 선생의 민족독립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같은 결심을 가졌던

    선생은 1917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후 다시 미국으로 유학을 가려고 하였으나 경비문제로 포기하고 귀국하여 최규동

    (崔奎東) 교장의 권유로 중동(中東)학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다가 이후 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로 옮겨 비교헌법․국제공법․

     

    재정학 등을 강의하였다. 그러던 중 1918년 윌슨 미국 대통령이 제1차 세계대전의 강화원칙으로 민족자결주의를 천명

    하자, 이를 기회로 우리 민족도 독립운동을 일으켜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임규(林圭)․ 송진우(宋鎭禹)․

    최남선(崔南善)․정노식(鄭魯湜) 등과 국내 독립운동을 밀의하고, 11월 말 국외 독립운동단체 및 지도자들과 연락할 사명을

     

    띠고 해외로 나가게 되었다. 선생은 우리의 독립운동은 처음에는 평화로운 방식으로 시작될지라도 결국에는 군사행동을

    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우선 만주지방으로 가서 독립군 지도자 김좌진(金佐鎭) 장군 등을 만나 보았다.

     

    ♣ 서울에서 만세시위를 벌이다 일경에 쫓겨 중국으로 망명

     

    그리고 1919년 1월 상해에 도착하여 이주 동포들의 실정과 독립운동단체의 현황을 돌아보며 국내의 독립운동 소식을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런 소식이 없으므로 궁금한 나머지 2월 중순 상해를 떠나 천진(天津)․북경(北京)․심양(瀋陽)을

    거쳐 3․1운동 발발 직후인 3월 2일 귀국하게 되었다. 국내에 들어와 평양을 지나면서 3․1운동을 목격한 선생은 곧 서울

     

    에서의 대규모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제자인 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의 학생 강기덕(康基德)과 연희전문

    학교의 학생 한창환(韓昌桓) 등과 연락하여 3월 5일 남대문역 서울역앞 만세시위를 추진 지휘케 하였다. 이에 따라

    청년 학생들이 중심이 된 제2차 독립 만세시위가 남대문역앞에서 대규모로 전개되었는데, 이 시위는 3월 3일 고종의

     

    인산(因山)에 참배하고 귀향하는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줘 3․1운동의 지방 확산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로써

    일경의 주목을 받게 된 선생은 3월 14일 농사꾼 차림으로 용산역을 빠져나와 중국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정 기초위원으로 활약

     

    만주 봉천을 거쳐 3월 19일 상해에 도착한 선생은 독립운동의 중심기관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만들어야 한다는 데

    공감하고 이에 적극 동참하였다. 그리하여 각지에서 모인 독립운동자들은 우선 4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을 구성

    하고, 임시헌장을 제정한 뒤 4월 13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을 대내외에 공포하였다. 이때 선생은 임시의정원 의원

     

    으로 선임되어 이시영(李始榮)․조소앙(趙素昻) 등과 함께 임시헌장 제정 기초위원으로 활약하였다. 선생과 이들 두 분에

    의해 성안된 「대한민국 임시헌장 선포문」과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임시의정원의 결의를 거쳐 선포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대한민국 임시헌장 선포문

     

    신인일치(神人一致)로 중외협응(中外協應)하야 한성(漢城)에 기의(起義)한지 삼십유일(三十有日)에 평화적 독립을

    삼백여주(三百餘州)에 광복하고 국민의 신임(信任)으로 완전히 다시 조직한 임시정부는 항구완전(恒久完全)한 자주

    독립의 복리(福利)로 아(我) 자손여민(子孫黎民)에 세전(世傳)키 위하여 임시의정원의 결의로 임시헌장을 선포하노라.

     

    ♣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

     

    제2조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차(此)를 통치함

     

    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과 빈부의 계급이 무(無)하고 일체 평등함

     

    제4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신교(信敎) 언론 저작 출판 결사집회 신서(信書)

             주소 이전 신체와 소유의 자유를 향유(享有) 함

     

    제5조 대한민국의 인민으로 공민 자격이 유(有)한 자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유(有)함

     

    제6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교육 납세와 병역의 의무가 유(有)함

     

    제7조 대한민국은 신(神)의 의사에 의하야 건국한 정신을 세계에 발휘하며 진(進)하야

             인류의 문화와 평화에 공헌하기 위하야 국제연맹에 가입함

     

    제8조 대한민국은 구황실(舊皇室)을 우대함

     

    제9조 생명형(生命刑) 신체형(身體刑)과 공창제(公娼制)를 전폐함

     

    제10조 임시정부는 국토회복 후 만 1개년 내에 국회를 소집함

     

    이와 같은 임시헌장 10개조의 내용은 지금 보아도 근대 민주국가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는 정치 사회적 기본원칙과

    정신을 갖추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인류의 평화와 문화 발전에 기여하고자 하는 우리 민족의 평화주의적 사고,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을 무엇보다도 중요시 여긴 당시 독립운동자들의 인간 중심적 사고가 고루 반영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 임시정부 초대 내무차장으로 선임되어 연통제 창안에 일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조각(組閣)이 이루어지자 선생은 초대 내무차장 겸 내무총장 대리로 선임되었다. 그리하여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로 부임한 안창호를 도와 1919년 7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내 행정조직으로 연통제를

    창안 실시하는데 일조하였다. 연통제는 국민 간에 기맥(氣脈)을 상통하고 복국사업(復國事業)의 완성을 기하기

     

    위하여 내외의 활동을 일치시키고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내의 도․군․면 단위로 조직한 비밀 행정조직이었다.

    이 조직은 임시정부의 각종 활동과 법령을 전달하는 모세혈관으로 국내 동포들에게는 독립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게

    하였고, 임시정부에게는 국내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는 대정맥으로 기능하였다. 따라서 이는 임시정부의 국내

     

    통치행위의 근간이요 활동의 원천이기도 하였는데, 이의 실시에 안창호와 함께 선생의 노력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또한, 선생은 1920년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대리․외무총장 대리․국무원․비서장 등에 선임되어 활약하였고, 이후 법무

    총장․외교부장 및 임시의정원 부의장 등을 두루 역임하면서 임시정부의 분열을 방지하는데 심혈을 쏟아 부었다. 특히

     

    선생은 독립운동의 성공을 위해서는 중국 정부와의 협조가 필수적임을 인식하고, 1921년 4월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

    를 창립하여 한중합작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1923년 임시정부의 개편을 둘러싸고 개조파

    와 창조파의 갈등이 첨예화되었던 대에 선생은, 평소의 주장이던 대일 군사항쟁을 한중합작으로 실현하기 위해 중국

     

    국민 당군에 들어가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섬서성(陝西省) 독군(督軍) 호경익(胡景翼) 막하의 고문으로 들어가

    제2군의 중장(中將)이 되었다.

     

    ♣ 장개석과의 한중합작 국내 진공작전을 계획

     

    이 시기에 선생은 중국 학생과 한국 청년 5백 명을 모집하여 유격대의 일종인 분용대(奮勇隊)를 편성하고, 이들을 훈련

    시켜 점차 성장하면 만주로 가서 한중국경에서 군사행동을 일으켜 국내로 진격한다는 군사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를 실행하기 위해 선생은 우선 신흥무관학교 제1회 속성과를 졸업하고 의열단(義烈團)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성주

     

    식(成周寔)을 북만에서 초빙하여 국민당 제2군 육군 중위에 임명하였다. 그런 뒤 분용대 연성대장의 책임을 맡겨 교육

    훈련에 전념케 함으로써 국내 진공작전 준비를 차근차근 진행시켜 갔다. 하지만 1924년 가을 선생의 후원자인 호경익이

    갑자기 사망함에 따라 분용대에 의한 국내 진공작전계획은 좌절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선생은 1926년 북벌중인

     

    장개석(蔣介石)․백숭희(白崇禧)와 남창(南昌)에서 만나 분용대의 병력과 훈련상황을 이야기하고 한중합작으로 한만국경의

    일본군 토벌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당시 이들은 자국의 혁명에 주력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생의 한중합작에 의한 국내 진공

    작전계획은 성사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1927년부터 남경정부의 심계원장(審計院長) 우우임(于右任)의

     

    배려로 심계원에 근무하면서 그 보수로 원로 독립운동자들을 원조하는 한편 기회가 있을 때마다 중국 지도자들을 만나

    한중합작에 의한 대일항전을 역설하고 다녔다.

     

    ♣ 한인 동포들의 민족정신과 독립의지를 배양

     

    한편 1926년부터 우리 독립운동계에는 중국 국민당과 같은 민족대당(民族大黨)을 결성하여

    이당치국(以黨治國)형태를 취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임시정부는

    1927년 3월 제3차 개헌을 통하여ꡐ이당치국ꡑ의형태를 도입한 개정 헌법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에 독립운동자들은 각각의 운동방략과 이념, 친소(親疏) 관계 등에 따라 독립운동을 제일차적

    목적으로 하고, 독립 후의 신국가건설이나 민족사회의 재구성 방안을 정강(政綱)으로 제시하면서 민족정권에의 적극적 참여

    의지를 표출한ꡑ독립운동정당을 창당하여 갔다. 정치 경제학을 전공한 선생 또한 이같은 조류를 선도하면서 1929년 안재환․

     

    윤기섭․성주식․김홍일 등과 남경에서 한국혁명단(韓國革命黨)을 창당하였다. 그리고 그 산하단체로 철혈단(鐵血團)을 조직

    하여 무장 독립투쟁을 준비하는 한편 '우리의 길'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하여 한인 동포들의 민족정신과 독립의지를 배양

    하여 갔다. 이 시기 일제는 대륙지배의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1931년 9월 이른바 만주사변(滿洲事變)과 1932년

    1월 상해사변(上海事變)을 도발하여 중국 침략을 본격화하고 있었다.

     

    ♣ 민족의 역량 집중시킬 단일대당 「민족혁명당」 창당

     

    이에 따라 민족의 모든 역량을 대일항전에 결집할 필요성이 더욱 증폭되어 갔다. 때문에 각각의 독립운동단체와 정당들은

    대일항전에 총력을 다하고자 민족협동전선의 형성에 온갖 노력을 쏟아붓고 있었다. 선생은 이때 한국혁명당의 대표로

    1932년 11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의열단․한국광복동지회(韓國光復同志會) 등의 대표들과

     

    협의하여 민족협동전선으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을 탄생시켰다. 이 동맹은 혁명역량의 집중과

    지도의 통일로써 대일전선의 확대 강화를 도모하고, 민중의 기초 위에서 직접 군사행동을 투쟁노선으로 설정하여

    대일항전의 구심체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선생은 이 동맹에서 최동오(崔東旿)․김규식(金奎植)․박건웅(朴建雄)과 함께 상무

     

    위원으로서 활동하였다. 하지만 이 동맹은 가맹단체 간의 연락 협의기관으로 일종의 단체연합적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그 결속력과 통제력의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면서 대일항전에 민족의 모든 역량을 집중할 수

    있는 명실상부한 민족통일전선으로 단일대당(單一大黨)의 결성이 요청되었다. 이에 따라 1934년 초 선생은 단일대당 형성의

     

    일환으로 우선 자신이 속한 한국혁명당을 '만주사변' 이후 만주에서 관내 지역으로 이동한 한국독립당과 합쳐 신한독립당

    (新韓獨立黨)을 창당하였다. 그리하여 이를 매개로 기존의 독립운동 정당과 단체를 해소하여 단일대당을 창당하는 방식의

    민족통일 전선 형성에 진력하였다. 그 결과 1935년 7월 남경 금릉(金陵)대학에서 민족통일전선의 원칙 아래 신한독립당

     

    (윤기섭)․의열단(김원봉)․조선혁명당(최동오)․한국독립당(조소앙)․대한독립당(김규식) 등 5당 통합으로 민족혁명당의

    창당이 이루어졌는데, 이의 성공이 있기까지 선생의 역할이 컸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한국독립당 재건파가

    탈당하고, 나아가 1937년 1월 제2차 전당대회를 계기로 비(非) 의열단 계열의 일부 인사가 이탈함으로써 그 세력이 위축

     

    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같은 해 7월 7일 일제는 노구교(蘆溝橋)사건을 기화로 중일전쟁을 도발하고 중국 전역을 유린

    하기 시작하였다. 독립운동단체들은 이같은 상황 변화에 따라 두 갈래로 체제를 정비하여 본격적인 대일항전을 준비하여

    갔다. 하나는 1937년 8월 한국국민당(김구)․한국독립당(조소앙)․조선혁명당(이청천) 등의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光復

     

    陣線) 결성이었다. 다른 하나는 같은 해 12월 민족혁명당(김규식․김원봉)․조선민족해방동맹(김성숙)․조선혁명자연맹

    (유자명) 등의 조선민족전선연맹(民族戰線) 결성이었다. 민족혁명당의 선전부와 국민부 요원으로 활동하였던 선생은 이때

    조선민족 전선연맹의 결성에 참여하였고, 그 뒤 중국 각지를 순방하면서 대일항전을 지도하였다. 그러던 중 선생은 1938년

     

    9월 민족전선 내의 급진적 무장투쟁 단체로 한구(漢口)에서 새롭게 조직된 조선청년전위동맹(朝鮮靑年前衛同盟)에

    가담하였는데, 이는 애시당초 무장투쟁을 주장해 왔던 선생의 입장에서는 어쩌면 당연한 처신이었을 것이다.

     

    ♣ 독립운동에 있어서 통합과 연대를 강조

     

    한국독립운동계의 이같은 양대 분립은 대일항전 수행에 차질을 가져올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내외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들 양대 계열의 핵심적 인물인 김구와 김원봉은 1939년 5월 동지․동포에게 보내는 공개

    통신에서 통합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같은해 8월 27일부터 사천성 기강에서 광복진선과 민족전선

     

    양측의 통합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의 광복진선측 3개 당 대표로는 한국국민당의 조완구․엄항섭, 한국독립당의 홍진․

    조소앙, 조선혁명당의 이청천․최동오 등이 참석하였다. 민족전선측 4개 당 대표로는 민족혁명당의 성주식․윤세주, 조선

    혁명자연맹의 유자명, 조선민족해방동맹의 김성숙, 그리고 조선청년전위동맹에서는 선생이 참석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7당회의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조선청년전위동맹의 최창익(崔昌益) 등 18명이 통합회의와는 아랑곳하지 않고 연안으로

    가버렸다. 따라서 7당 통합이 무산되어 독립운동상에서 항상 통합과 연대를 앞장서 실천해 온 선생은 매우 통탄해 하였다.

    이후 선생은 조선의용대 병력이 모여 있는 낙양(洛陽)으로 가서 김성숙의 조선민족해방동맹과 연합하여 조선민족해방

     

    투쟁동맹의 결성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이들을 지도하면서 1941년에는 한중합작으로 한중문화협회를 조직하여 상무위원

    으로 활동하였으며, 다시 임시정부에 합류하였다. 그리하여 1941년 6월 선생은 임정에서 외교연구위원회 위원으로 선임

    되었고, 1943년 4월 대한민국 잠행관제에 의해 설치된 선전부의 선전위원회에서 조소앙․엄항섭․유림(柳林) 등과 활동

     

    하면서 대한민국의 선전계획의 수립과 실행에 이바지하였다. 나아가 1944년 5월 임정의 연립내각 성립 때 내무부장에

    선임되어 활약하다가 중경(重慶)에서 광복을 맞이하였다.

     

    ♣ 광복후 자주적 민족국가 건설의 희망을 안고 귀국

     

    광복 이후 선생은 1945년 12월 2일 임정요인의 제2차 환국때에 벅찬 감격과 자주적 민족국가

    건설의 희망을 안고 귀국하였다. 하지만 귀국 직후 모스코바 삼상회의에서 신탁통치안이 결의되자

    김구 주석을 도와 반탁운동을 선도하였다. 이와중에서도 선생은 1946년 국민대학(國民大學)을

     

    설립하여 민족국가 건설의 동량(棟梁)을 육성하는 한편 「자유신문(自由新聞)」을 발행하여 민족 자주성을 함양하여 갔다.

    1948년 5월 제헌의원 선거에 경기도 광주에서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이후 초대 국회 부의장과 이승만(李承晩)의 후임으로

    국회의장에 선출되어 활동하면서 대한민국 건국에 크게 공헌하였다. 특히 1956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국민

     

    대중의 염원을 실현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다가 5월 5일 호남선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급서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1956년 5월 3일 신익희의 한강백사장에서 한 선거유세

     

      여러분!

      이 한강 모래사장에 가득히 모여주신 친애하는 서울시민! 동포! 동지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해방이 되기 전에 약 30년 동안이나 외국에 망명생활을 하던 사람의 하나로 오랜 시간을

    두고 본국 안에 살고 있는 부모, 형제, 자매, 동포, 동지들이 그리워서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고 한숨을 짓던 사람입니다.

      오늘과 같이 많은 우리 동포, 동지들과 이 한자리에서 대하게 되니 내 감격은 무엇이라 말하기 어렵습니다.

     

    더욱이 6․25사변 때 우리 전국 남녀 동지들의 가슴속에 깊이 박힌 원한의 이 한강,  오늘 이렇게 많이 만나 뵙게 된 것도

    감탄 회포를 불금(不禁)하는 바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40년 동안이나 두고 우리 전국민 동포들 남녀노소를 물론하고 우리 나라가 독립이 되어야 우리는 살겠다고

    하였거니와, 참으로 우리는 오매지간(寤寐之間)에도 염원하고 성축하고 바라고 기다리던 우리 독립국민의 자유를

    옹호하는 민주주의 국가를 우리들이 찾은 지 벌써 8년입니다. 일본제국주의의 파멸에 이은 무조건 항복이라는 것이

     

    있은 지 10년이나 되는 것을 기억하지만 우리 나라가 독립이 되어서 대한민국에 정부가 선지도 8년이 된 것입니다.

    우리들의 살림살이 살아가는 형편이 어떠한 모양이었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우리 전국 동포 동지들이 날마다 시간마다

    꼬박꼬박 우리들이 몸소 겪고 지내 내려 온 터인지라 여러분은 특별히 잘 체험하고 잘 기억하실 것입니다. 만일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양 이 꼬락서니 우리들이 40년 동안 두고 밤이나 낮이나 원하고 바라던 독립, 이 독립 이것이 결코 우리가

    사는 꼬락서니, 이와 같으리라는 것을 생각했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

    이 까닭이 무엇입니까?

    세상만사가 이유 없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무슨 이유? 무슨 까닭? 이 까닭은 다 이야기한다 할지라도, 책임 맡아

    나라 일 하는 이들이 일 잘 못해서 이 꼬락서니가 되었다는 결론입니다. 이것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헌정대원의 원칙일

    것입니다. 국토는 양단 된 채로 우리들이 사는 형편, 어데 가던지 우리가 이 모양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우리들은

     

    어떻게 해서 이러한 고생에 파묻혀 있나? 여러분, 오직 우리 나라 정치가 한 사람의 의사에 의한 일인 독재정치로

    여론을 다 무시하고 제 마음대로, 제 뜻대로 함부로 비판이나 모든 가지의 체계 없는 생각이란, 정책이란 하는 것을

    함부로 거듭해서 불법이니 무법이니 위법이니 하는 것이 헌법을 무시하는 것을 비롯해서 큰 법률, 작은 법률 지키지

     

    않는 까닭에 우리들의 도덕은 여지없이 타락되어서 사람인지 짐승인지 구별이 없는 이러한 형편으로 한심한 형편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까? 한겨레의 능률은 극도로 저하가 되고 우리 전국의 우리 군인, 동포, 동지들은 고통의 위협에

    허덕이고 있을 뿐더러 빌어도 환멸인, 이런 그늘 밑에서 우리들은 시들고 있는 것입니다. 어찌하면 우리는 살아 나갈

     

    수 있을까? 나는 우리 이 위기와 이 곤경에 직면하고 있는 우리 국가 민족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사랑하는 이 나라,

    사랑하는 이 민족을 어떻게 해야 보다 났게 바로 살아가도록 힘을 쓸 수 있을까? 우리 나라, 우리 민족을 어떻게 해야

    구할 수 있을까 하는 이 어리석은 그러나, 내 정성 된 몇 가지의 의견을 여러분께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생각하기를 신익희라는 사람은 민주당에서 앞으로 오는 선거에 대통령의 후보자로 지명 받은 사람이니, 이제

    몇몇 마디의 말은 만일 자기가 투표를 많이 받아서 대통령으로 당선이 되면 이런 이런 일을 하겠다고 우리 국민들에게

    하는 약속이리라 들어주셔도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통령에 당선되고 안 되는 것은 원칙적으로 전 국민이 지지

     

    하고 찬동해서 많은 표를 던져줌으로 해서 당선되어 대통령이 되는 것이지 자기가 잘났다고 “내가 대통령 되겠다”,

    “나를  따르라” 이러한 생각 가지고는 대통령이 되기가 어렵다는 것이 아마 우리 일반 사람들이 아는 도리일 것입니다.

      특별한 방법으로 되고 안 되는 것은 나는 알 수 없고, 이러한 처지니까 만일 내가 오늘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는 몇 마디

     

    이야기는 대통령이고 무엇이고 다 집어치우고서라도 우리 나라가 이렇게 해야 잘 될 것이고, 우리 민족이 이렇게 해야

    잘 살 수 있으리라 하는, 한집안식구가 한자리에 모여서 걱정하고 의논하고 얘기하는 격으로 여러분이 들어 주신대도,

    많이 틀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는 말입니다. 제일 먼저 중요한 줄거리를 말씀드리면 사람과 짐승의 구별은 도의 도덕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이 사람 사는 보람이지 남부럽지 않게 남의 뒤에 떨어지지 않게 잘 살아가자는 것이 우리

    전체의 목적이라면, 우선 먼저 사람다운 표준을 세워야할 것입니다. 양심 있고 올바르게 일하고 사람 속이지 아니하고

    책임지고 모든 갖가지 일을 틀리지 않게 해가자고 하는 사람들을 오늘날 이 세상에서 행세를 못하게 되는 처지입니다.

     

    양심 떼서 선반에 올려놓고 얼굴에다 강철 쪽박을 뒤집어쓰고 사람을 속이고 거짓말하고 도적질 잘하는 자들이 대로

    활보하고 행세하고 꺼덕 대고 지내는 세상입니다. 이러하니 만일 이 세상이 그대로 이렇게 지속되어 간다면 아마 사람다운

    생활을 하기에는 틀렸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선 먼저 사람을 예의염치를 찾는데 있다는 옛날 교훈을 받아 새로 우리는

     

    정신을 가다듬고 마을을 바꿔 먹자 하는 말을 제일 먼저 첫 마디로 드립니다. 둘째로 우리는 오늘날 살고 있는 이 나라는

    옛날과 달라서 민주국가라는 나라입니다. 백성이 제일이요, 백성이 주장하는 나라인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이름은

    대한민국이라 백성의 나라, 이 백성의 나라는 옛날 나라와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민주국가에서 제일 우리들이 주의하는

     

    것은 법을 다스리는 나라다 하는 것을 제일 먼저 주의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학자들이 말하기를 민주국가라 하는

    것이 거죽 외면으로 되는 것이라 하면, 이면에 있어서는 법을 다스리는 법치국가이라는 이야기를 다 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옛날 지나간 시간에는 황제의 말 한마디가 법률이라고 해서 지키지 않으면 모가지를 자르는 때도 있었지만,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한사람의 말이나, 요새 항용 보는 특명이니, 무슨 명령이니, 특권으로 무슨 명령한다, 유시한다

    하는 것이 법률을 못 당하는 것이며, 법률이래야만 반듯이 하는 일, 못하는 일을 규정한다는 법치의 정신을 지키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법률이야말로 전국민의 뜻대로 국회에서 통과되는 것이 법률인데, 이 법률이야말로 대통령 되는 사람부터

     

    저 길거리에서 지게를 지고, 품삯을 지는 친구들에게 이르도록 남녀노소, 부귀빈천 아무 구별 없이 법률 앞에서는 다 만인이

    평등으로 다 똑같이 지켜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형편으로 이런 말을 하기가 나부터도 가슴이 쓰린 얘기입니다

    만은 대한민국의 법률의 그물의 커다란 독수리는 물론이려니와 까막, 까치, 제비까지도 모다 뚫고 나가지만 불쌍하게도

     

    법률 그물에 걸리는 것은 오직 파리나 모기 뿐이라 하는 얘기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답게 살려고 하면

    도덕과 도의를 높여 가지고 큰 법률, 작은 법률 다 지켜야 될 것이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다음 얘기할 것은 우리 동포들이

    주야로 염원하고 있는 우리 국토의 통일, 우리 국가 재건에 선결 문제되는 이 남북통일의 문제, 이 통일문제, 우리들이 산

     

    사람을 비유한다면, 한 허리 중간에다 바 오래기로 잔뜩 동여매 놓고 밥 한 숟가락을 한 모금, 잘 내려가고 넘어갈 이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형편으로서는 남쪽이 없이 북쪽이 살아가기 어렵고, 북쪽이 없이 또한 남쪽이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조상 때부터 단일민족으로 정든 삼천리 강산을 반쪽으로 나눌 수 없는 것도 또다시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만,

     

    현재 우리가 사는 경제 형편으로 본다 할지라도 남북이 통일되지 않는 한 제대로 우리의 행복스러운 생활을 해 가는 것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북을 통일하자는 것이 우리 민족의 제일 간절한 근본의 과제인 것이고 의무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모두 가지 잘 살아가자는 데에 선결문제라는 것을 다같이 생각하고 있어요. 이것은 모든 가지

     

    일이 국내적 형편이나 국제적 형편에 알맞게 현실적으로 되도록 우리가 해가야 될 것은 물론 입니다. 우리 전 민족의 본의

    아닌 휴전조약이니 하는 것이 성립되어 가지고 몇 해째 계속하고 있지만 필경은 조국을 통일이라는 이 문제야 우리들이

    해결한 문제인데는 틀림없지만은, 이것저것 상관할 것 없이 덮어놓고 오늘 저녁이나 내일 아침이라도 북쪽으로 밀고 올라

     

    가서 당장에 백도산 꼭대기에다 태극기를 휘날리고 두만강, 압록강 물에 우리의 마른 목을 축이자는 이 희망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누가 없으리요 만은 되지 않는 헛소리, 책임지지 않는 큰소리 아무리 소리질러 보았댔자 특별히 뜻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될 수 있는 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우선 먼저 우리가 생각해야 되겠다는 나의 주장입니다.

     

      여러분! 나라의 목적이 어데 있느냐? 정부를 세우는 목적이 어데 있느냐? 우리 국민이 다 잘 살아가자는 것이 나라의

    독립의 목적이오, 민족의 자유의 목적이고 정부 건립의 또한 목적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뭐니뭐니 다 얘기할 것 없이 우선 먼저 우리 국민이 잘 살아가도록 올바른 민주정치로 백성을 위하는 정치, 백성이

    하는 정치, 백성의 정치라는 유명한 이상적인 민주정치 정의로 내리고 이야기하는 이 실상에 있는 이 올바른 민주정치를

    우리는 하나하나 실행함으로써 우리 전국민이 마음으로 연구해서 옳다! 우리 정부야말로 우리를 살게 하는 정부다. 우리는

     

    정부 없이 살아갈 수 없구나. 이 정부야말로 과연 우리 정부다. 남녀노소를 물론하고 이와 같은 신의와, 이와 같은 대세가

    우리 정부에 오도록 우리는 정치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북쪽의 공산치하에서 신음하고 있는 수많은 이북

    동포 동지들 목을 길게 들여서 목구멍이 마르도록 하루바삐 백성을 위하는 우리의 정부, 대한민국, 우리 조국의 따뜻한

     

    품안으로 한시간 바삐 들어가서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자는 터전을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놓으면, 어느 사람 치고 자유없이

    구박받는 정치제도 하에서 살겠냐고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정치를 잘해서, 백성들을 잘 살도록 해야만 될

    것인데, 오늘날과 같은 정치를 해 가지곤 도저히 우리 국민이 행복하게 살 수 없어요. 우리가 밤낮으로 염원하는 첫째

     

    조건으로써 우리가 잘 살수 있게 하는 올바른 민주정치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즉 국민이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국정의 혁신이 있는 연후에 비로소 국방력도 강화될 수 있고 모든 국민이 마음놓고 북진통일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형편을 보면, 국민은 생활고에 허덕이어 못살겠다고 하고 있는데, 큰소리로 뭐니뭐니 하는 것은 하나의

     

    공수표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가지 자랑거리가 있다고 공연히 내 대지 말고 한가지라도 내 손으로 내 힘으로

    만들도록 하는 현명하고 슬기로운 방면으로 여러 군사방면으로 최후의 승리를 가져온다는 것은 평시에 보기 좋은 장비를

    훌륭하게 가졌다는 것이 최후의 승리를 얻는 요건이 아닌가? 하루 반나절 못돼서 최후의 승리를 가져오는 비결은 장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충에 있다는 것입니다. 대포 하나 없어지면 보라는 듯이 보충하고, 탄알이 몇 십만 발 몇 백만 발 없어

    지면 보라는 듯이 보충해 놓고, 비행기가 오그라지면 비행기다 화염방사기가 없어지면 또한 화염방사기다, 이렇게 보란

    듯이 보충 보급이 돼야 최후의 승리를 가져온다 이 준비야말로 싸움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이면 다 아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군사, 어느 한가지 우리 나라에서 총 몇 자로나 만든다고 그럽디까, 우리 나라에서 탄알을 몇 개나 만든다고 그럽디까?

    그런고로 우리 나라 우리의 힘으로 모든 우리가 다 마련해 놓고 얘기를 해야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긴요하고

    근본인 우리의 조국통일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는 정치적으로 기본을 삼고 군사역량을 조금 가미해 가지고 평화로운 방법이

     

    7, 8할이라 하면 이외의 다른 방법을 한 2, 3할쯤 가미를 해 가지고 우리는 통일하는 것이 근본 결론의 길이고 또한 우리 국내,

    국제적으로 제약 돼있는 우리 형편에 반듯이 현실적으로 우리가 노력할 일이라 하는 것을 나는 말씀드립니다.

     

      그 다음에 여러분!

      오늘날 우리 민주국가의 형편은 지나간 세대와는 달라요. 대통령이 대단히 능력 있고 자격 있고 고귀한 듯한 지위에 있는

    사람이지만 민주국가에서 대통령을 무어라 그러는지 여러분들은 다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하인이라고 불러요.***

    프레지던트라고 불러요.***프레지던트라는 말은 심부름꾼이 되는 하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대통령은 하인인데

     

    대통령 이외의 사람들 부장, 차장, 국장이니, 과장이니, 지사니, 무슨 경찰국장이니, 군수니, 경찰서장이니, 또 무엇이니 하는

    사람들이 거 뭐일까요? 하인 중에도 자질구레한 새끼 파리들이다 이 말이예요. 그러므로 하인이란 말은 심부름꾼이란 말을

    비유로 얘기 해보면, 농사 짓는 집의 머슴꾼 같은 것이고 장사하는 댁의 하인 꾼 같은 것입니다. 대통령이라고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고, 땅에서 솟아 난 것이 아니요. 그러므로 일 잘못하면 주인 되는 우리 국민들이 반듯이 이야기하고,

    반듯이 나무라고, 반듯이 갈자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런 말입니다. 여러분 이것이야말로 당연한 일입니다. 주인 되는 사람이

    심부름하는 사람 청해 놓았다가 잘못하면 “여보게 이 사람 자네 일 잘못하니 가소”하는 것이 당연한 게 아니겠습니까?

     

    요새 무슨 표어를 보면 ***모시고 ***받들고 ***뭐고뭐고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만은 다 봉건 잔재의

    소리입니다. 모시기는 무슨 할아버지를 모십니까? 받들기는 뭐 상전을 받듭니까? 이러므로 만일 주인 되는 국민들이 언제나

    “당신 일 잘못했으니 그만 가소” 그러면 두 마디가 없는 것입니다. “대단히 미안합니다. 일 잘못했으니 나는 물러가겠습니다"

     

    하고 가야합니다. 요새는 어떻게 되었는가 하면 “가거라”하면 “가? 어딜 가! 날더러 가라구! 당치 못한 소리” 거 좀 실례에

    가까운 말이지만, 농사 짓는데 무슨 논을 갈던지 할 때 논 속에 많은 거머리가 정강이에 딱 달라 붙으면 암만 때려고 해도

    자꾸 파고 들어갑니다. 거머리 달라붙듯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 말이 통속적으로 얘기했습니다 만은 우리 민주당에서

     

    정치적인 원칙으로 내각책임제의 책임제도로 정치를 하자는 것이 이 진리를 우리는 주장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국민의

    대표격인 국회에서 “당신 일 잘못하니 정부 그만둬” 그러면 당연히 책임지고 물러가야 하는 것이다 이 말입니다. 그거야

    요새 국회의 형편 모양으로 한 당의 사람들이 굉장히 수요를 모아 가지고 된 일도 손을 들고 안된 일에도 손을 들고 그래가지고

     

    전체의 올바른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고 두통을 앓도록 하는 형편입니다. 이러한 것조차 우리는 주의를 해야 된단 말씀입니다. 

    쓸데없이 공연히 정부에서 괜찮게 일하는데도 “가거라 말아라”하는 때에는 그것도 좀 어렵습니다. 그런 까닭에 말썽 많으면

    가는 게 원칙이지만 쓸데없이 공연한 험담이나 하고 가라고 하는 때에는 과연 이게 전국민의 의사가 이런가 아닌가 그걸 또

     

    알아보는 방식으로 해 가지고 정부에서는 국회를 한번은 해산시키는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 내각책임제가 가지는 근본

    뜻일 것입니다. 이것이 내각책임제의 알기 쉬운 이런 얘기를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다음은 우리 일반 행정방면으로 어떻게

    해야 우리들은 보다 났게 살아보겠는가? 제일 먼저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나라살림을 해 가는 데 제일 긴요하고 시급한

     

    문제 즉 일반 공무원에 대한 문제입니다. 나라 일을 해 나가는데는 수많은 일꾼이 필요해요. 중앙정부나, 지방정부나,

    문관이나, 무관이나, 경찰이나, 군인들이나, 전부 몰아서 국가의 공무원이란 명칭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자-, 이분들이 오늘날

    우리 일하고 있는 형편이 어떠합니까? 애는 많이 쓰고 가진 고생 다 겪어 내려오는 우리 일반 공무원 동지를, 나는 늘 평소에

     

    얘기하기를 말이나 노새에게 짐을 지워서 백 리나 팔십 리 길을 가라고 할 때에는 반드시 그 말이나 노새에게 먼저 먹이를

    먹이라는 것입니다. 먹이를 배불리 먹이지 아니하고는 팔십 리 백 리를 그대로 가라하고 채찍질한다고 하면 그 말이나 노새가

    그대로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나라 공무원의 형편은 어떠합니까? 한 사람이 이십 일이나 아니 반달이나

     

    제대로 살아가기 어려울 만한 월급푼어치를 주면서 어느 누군가 부모처자 없는 이가 있어요 적어도 사오식구를 부양해서

    살아가는 이러한 형편이나 우리가 늘 말 듣건대 우리 공무원들이 일 잘못해간다고 행정에 효율이 올라서지 않는다고 더 심한

    말인지는 모르지만 일본 사람들이 있을 때에는 세시간 동안 일하면 해내던 일을 군정 때가 되니까 사흘동안을 가지고도 다

     

    못해 내더니 대한민국이 생긴 뒤에는 석 달이 되어도 뒤뭉개고 해놓지 못하더란 말입니다. 무슨 까닭일까요. 도장 하나 찍어서

    결재해주는 일이라는데, 한달 두 달 석 달 넉 달 끈단 말이야요, 또 어떤 이가 얘기하는 것을 들으니 무슨 대통령 비서실로 끌고

    갔다 끌고 내려왔다 올라갔다 칠십일 동안 돌아다녀도 도무지 도장이 안 찍혔다는 그런 말을 최근에 들었습니다. 왜 이러느냐

     

    말입니다. 얘기를 들어보니 또 무슨 사바사바가 있어야 된다고 교제가 있어야 된다구요. 왜 이러는 것일까요. 왜 이러는 거냐

    말입니다. 여러분 대한민국에서 공무원의 생활을 최저한도로 보장을 아니해주고 공무원의 신분을 확보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일 잘 해 가거라하며 그대로 밀고 끌고 가는 것은 곧 대한민국의 공무원들은 도적질해서 먹고 살라하는 말과 똑같은 것이라고

     

    나는 말합니다. 실정에는 우선 맞도록 최저한도 조밥이나 보리밥이라도 배가 고프지 않도록 주고 무명이나  외양목 끝이라도

    집안식구의 등어리를 덮어줄 수 있게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부패한 공무원이 비단으로 감고 싶다든지 산해진미의 좋은

    음식을 먹고 싶다고 하여서 그러기 위해서 수뢰를 받거나 요새 흔히 하는 말로 사바사바를 하거나 이렇게 되거든 아무

     

    사양할 것 없이 그야말로 모가지를 잘라 버리라는 말입니다. 이러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먼저 나라살림을 꾸려 가려면은

    일반 공무원동지들에게 신분을 보장하고 최저한도의 생활을 확보해 주어야한다는 말을 드리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또

    한마디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민주국가를 꾸려가려고 할 때는 백성이 주인이라는 세상이 있도록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극히 적은 말같습니다마는 우리 나라의 신문이나 영화에 돌아 다니는 것을 본다면 봉건시대의 계급적

    용어가 얼마든지 아주 상투적으로 습관이 되어서 그런지도 모르고 그대로 줄줄 써내려 온단 말입니다. 각하가 왜 그렇게

    많은지 ***각하 ***각하는 민주국가의 알 수 없는 취미야요. 원칙적으로 ***각하는 다리 아래가 각합니다.

     

    다리 아래. 또 말하자면 유시라는게 있습니다. 신문에 보면 대통령의 유시라고 있습니다. 유시가 뭡니까? 유시가요. 여러분이

    아실 것입니다. 한문 글자에 유시라는 글자는 그전에 황제가 쓰던 자예요. 요새 대통령이 말하면 지시라던지 훈시 한다던지

    하면 다란 말입니다. 유시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거기다 더군다나 대통령이 분부를 한다든지 분부가 뭐 입니까? 분부가... 

     

    무슨 얘기를 한다든지 그러면 모르려니와 상전이 종들에게 분부하는 게고 더구나 가정에서 높은 어른이 얕은 비속에게 분부

    한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아래하(下)짜 줄 사(賜)짜 그전에 황제, 임금이 신하들에게 주는 것을 하사라 그랬습니다. 하사는

    뭐냐 말입니다. 그런 것이 썩 집어 치워야 해요. 내가 이 간단한 몇 마디를 얘기한다는 것은 민주국가에서 관권이 너무 남용

     

    된다는 얘기입니다. 아까 말과 마찬가지로 대통령이 심부름꾼이고 하인이라면 관권의 남용된 유시가 뭐란 말입니까? 오늘날

    어떻게 되고 있어요? 특별히 경찰권의 남용, 특무대니, 경찰이니, 무시무시합니다. 관리 공무원들은 다 하인들이란 말이야요.

    하인이 주인의 따귀를 부치고 발길질을 하고 대들어 보아야 그놈의 집안은 거꾸로 돼서 다 망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부럽지 않게 살려고 하면은 관권의 남용을 애초 썩 집어치우란 말입니다. 이것은 일반 행정 면에서 얘기를 하고 다만 아무리

    무어라 말하더라도 현재 우리생활에 있어서 재정경제와 상공방면에 상관된 얘기를 한마디 아니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무엇

    보다 민주국가나 무슨 국가를 막론하고 더군다나 백성이 주인이 된다는 나라에 있어서 우리들이 자발적으로 결심하고 각오 해

     

    가지고 우리 나라를 꾸려 가는 재정 우리의 세금으로 다 마련하는 우리 의무를 진 것입니다. 세금, 세금의 의무는 우리들의

    거룩한 힘으로 우리들이 다 지고 있어요. 그렇지만은 오늘날 이 세금제도의 소위 인정과세라고 하는 것은 당신은 이만큼 벌

    것이라고 이만큼 내라는 경우라니, 이런 제도 이게 무슨 제도입니까. 우리 나라 이외 다른데서 별로 보지 못하는 제도입니다.

     

    세금이라는 것은 얼마를 벌면 얼마를 내라는 그 비율이 결정 됐단 말입니다. 그런 제도이기에 모든 가지 폐단이 여실히 있어

    가지고 제게 달갑게 하면 많이 벌어도 세금을 적게 내라고 하는 것이고 제가 밉게 보는 처지라면 아무리 돈을 벌지 못하는

    형편이라도 세금을 많이 무겁게 부과시켜 가지고 못 살게 하는 이거야말로 무엇이겠습니까? 국가의 세입이 마련 없이 줄게

     

    되고 전 국민이 이 세금 난리에 눈, 코를 뜨지 못해 못살게 되는 지경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인정과세의 제도라는 것은

    하루바삐 폐지해야 되겠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 이외에 모든 가지 잡부금, 농촌에도 도시에도 기가 막히는 잡부금,

    될 수 있는 한 경감해 가지고 우리 전 국민에게 고통이 적도록 마련해야 되겠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더군다나 우리 도시와

     

    서울에서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는 전 시민 동포동지들이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문제이겠지만 은행에서 빚 쓰는 문제, 옛날에

    은행이 없을 때는 말할 것 없지만은 국가에서 은행을 가지고 있는 의무가 우리 돈버는 사람들이 집에다 그대로 돈을 두기에

    편치 않으니 은행에 갔다두고 이자를 붙여서 돈을 맡기는 것도 그 목적이겠지만, 그것보다 더 주요한 것은 생산업의 밑천으로

     

    은행에서 빚을 내서 자기가 저당을 하거나 신용대부를 해서 크거나 적거나 사업에 종사를 해서 은행에도 이가 되고 장사하는

    이들 공업하는 이들 공장하는 이들도 많은 이익을 받게 되어서 이것이 개인 살림살이도 늘러 갈 뿐더러 국민의 경제가 발전이

    되고 전 국가 경제가 번영하는 까닭에 이것은 전국민의 기가 막히는 긴요한 관계를 가진 은행문제인데, 여러분 오늘날 우리

     

    은행의 융자, 은행의 빚 쓰는 관계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여러분 계획적입니다. 자기에 가까운 사람만이 은행에 가서 돈을

    얻어 쓸 수 있고 자기네가 밉게 보고 자기네가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돈을 얻어 쓸 수 없게 하는 형편이 아니겠습

    니까? 더욱이 정부 방면에서 특권으로 은행융자를 이렇게 저렇게 좌지우지하게 되는 형편이라면, 우리의 국민경제의 우리의

     

    산업발전, 우리의 재정경제가 정상적으로 발전되리라는 우리가 기약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오늘과 같이 은행의

    문을 닫고 좁다하게 뒷문으로 옆문으로 드나들게 되는 이와 같은 기현상은 하루바삐 고쳐서 은행의 대문을 활짝 전국민 앞에

    열어 놓아야 될 것이다 하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같이 하여 적어도 도시의 소규모의 생산업자에 큰 이익을 주어 앞으로

     

    유지하고 발전이 터전이 되게 하는 것이 그분들을 위하는 유일한 길이라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에 우리가

    다같이 생각해야 할 것은 농촌 문제의 일로서 우리 나라는 농업국가로서 전 인구의 7할 이상 8할이 농민입니다. 농민들이 잘

    살아서 농촌이 번영해야 우리나라는 잘된다는 이치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부인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러하니 우리 농촌에

     

    제일 먼저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은 토지 소득세라는 것, 이것도 6․25사변 직후로 군대 양식이라던지 모든 가지로 해서 단 1년

    2년 동안에 임시로 현물로서 토지소득세를 받겠다는 것이 정부방침의 토론 설명하는 얘기로서 국회의 통과를 받던 것이지만

    오늘날까지 꼬박꼬박 토지소득세 현물로 받고 있는 형편입니다.

     

      여러분!

      이것 돈으로 금전으로 받아야 된다는 것을 국회에서 몇 번을 통과했는데도 불구하고 정부에서 오늘날까지 그대로 현물을

    받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토지소득세를 폐지해야 되고 이것을 계속해서 나간다고 하면 우리 농민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잡부금. 농촌의 잡부금 많은 데는 백삼십 여가지, 적은 데라야 오십여 가지, 이 잡부금. 이건 과연

     

    우리 농민의 기름과 우리 농민의 땀을 그대로 긁어서, 더 못살게 하는 것이니 우리는 하루바삐 안 받도록 마련해야 되겠다는

     주장입니다.

     

      여러분!

    뿐만 아니라 비료를 싸게 때에 맞게 우리 농민들에게 배급을 해줘야 될 것은 물론이고 정부에서 양곡을 사들인다고 하는데도

    강제로 매상하는 제도를 치워버리고 적어도 쌀 한 섬에 농민이 얼마만큼 밑천을 들였다는, 그 밑천을 정부에서 주고 그대로

    사들이는 공정한 이 방법을 쓰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주장입니다.

     

      다음에 군사문제입니다.

      이 문제도 대단히 중요한 문제인데 조국을 방위하고 우리 전 민족을 수호해 나간다고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공산침략을

    방지하는 유일한 우리의 힘은 군사역량일 것입니다. 원래 국민의 의무로서 큰 일의 의무 세 가지 중의 하나로서 병역에

    복무하는 의무가 누구나 우리가 다 각오하고 있는 것이지만 여러분 오늘날 우리 나라에 병역이 공정하게 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고관대작의 아들 손자, 부자장자의 아들 손자, 특권계층의 아들 손자들이 얼마나 병정으로 전방에 가서

    지내느냐 하는 것을 여러분이 아십니까? 징용이다, 징병이다, 하는 이 두 가지 어느 것을 물론하고 어떤 계층이나 종류나

    물론하고 다 똑같이 공정하게 우리는 이 징용 징병에 복역해야 되겠다는 이 의무를 우리는 공정하게 져야 되겠다는 주장

     

    입니다. 이렇게 하므로 우리들은 병역에 가게 되는 것이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즐겁게 우리 나라를 위하고

    우리 민족을 위해서 우리가 당연히 질 우리의 의무일 뿐더러 누구나 다같이 하는 의무인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의 사기는

    앙양 되어 가지고 우리의 전쟁은 최후의 승리로 반드시 우리가 갖게 된다는 신념이 또한 이러한 것에 있는 것으로 여기에

     

    붙여서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뿐만 아니라 현대의 우리 전쟁은 수효가 많은 것에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다 아시다

    시피 핵 신무기나 원자탄이나 수소탄이라는 과학무기가 있을 까닭에 극히 적은 수효의 군사를 가지고서도 최후의 승리를

    가져 온다는 것을 우리가 다 잘 알고 있습니다. 하물며 옛날로부터 병부재다(兵不在多)요, 병(兵)이라는 것은 많은데 있는

     

    것이 아니고 재어정(在於精)이다. 정(精)한데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에서는 반드시 앞으로 군대에 관한 정병주의로

    지금 있는 군대의 수를 훨씬 줄여서 거의 반 가량을 간발해 가지고서 우리 나라의 병역을 공정히 하고 우리 군대의 군기를

    천명하게 잘 해 가지고 보면은 최후의 승리는 반드시 우리에게 온다는 신념을 우리는 다같이 갖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나는

     

    특별히 주장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끝으로 우리 교육문화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도 시간이 너무 걸려서 미안합니다마는

    우리 나라에서는 의무교육이라, 해놓고 실제로 우리가 의무교육을 하고 있습니까? 사친회비니, 소위 학교의 잡부금이니,

    다른 중고등학교하든지 대학교 학생들을 차지해 놓고서도 초등학교 학생아이들까지도 이 부담에 학부형 되는 이들이

     

    기가 막혀 머리가 빠진다는 것은 도리어 허식된 비유의 얘기고 그 아주 못살 지경이란 말이에요! 자 그러하니, 어떻게 됐고

    좀 깨끗하게 해봤으면 하는 주장입니다. 또 뿐만 아니라 대학교 관계에 있어서도 학원의 모리배처럼 법규에 맞지 않는

    대학이라는 것을 합리화하고 적법하게 정비해야 될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징집문제, 이것은 소집이거나

     

    징집이거나 다 응용되는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국가의 생명은 무한한 것입니다. 언제나 신진대사에 모든 방법을 아무리

    국보가 가난하고 위험한 경우에 있다 하더라도 위정 하는 사람들은 잊어서는 안됩니다. 국가의 위기로 후방에서 당장

    전국에 미만한 화약내 나는 전시판이라 하더라도 후방에서 교육받고 있는 학생들은 적어도 보류되어야 된다는 거의 원칙

     

    인데 요새는 징집에 관한 보류문제가 대단히 시끄러워진 모양입니다. 나는 후방의 국가의 동량의 재목으로 부흥재건에

    간부 양성하는 본의로 고등학교이상 대학교 학생동지들의 징집문제를 반드시 보류하는 것을 고려해야 되겠다는 주장

    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회문제에 있어서도 우리들이 간과하지 못하는 문제들은 더군다나 우리 서울 같은 도시들이야요.

     

    기술자, 한사람의 기술자면 하루 이틀에 양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기술자의 대접이 우리 대한민국처럼 초라한 나라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기술자는 정부에서 보장해서 취직문제나 모든 가지가 기술자 이외의 다른 사람보다는 특별히

    잘 되도록 해야 하는 것을 노력해야 될 것입니다. 전체의 실업자의 구제문제니 취직문제니 하는 것도 사회문제의 큰 문제

     

    이겠지만 기술자를 우선적으로 실업의 구제문제를 우리는 유의해야 되겠다는 것을 먼저 말씀드리면서 이 가운데에 포함

    되고 있는 문제이겠지만 수많은 상이용사 더군다나 전란에 전몰한 우리 군경장병들의 유가족의 구호문제 거기에 부수해서

    성질은 다르다 보겠지만 형편에 있어 같은 것이 6․25사변 때 무참하게도 이북에 납치되어간 가족들의 구호문제, 이런

     

    등등의 문제가 아무쪼록 합리적이고 적절하게 대대로 우리 정부, 우리 국가, 우리 전국민의 동정 거룩한 동족의 사랑으로

    바라는 것입니다. 미련하고 불쌍한 수많은 우리 동포들에게 따뜻한 마음과 부드러운 손이 닿도록 우리는 노력해야 되겠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적으로 동족의 의리로 반드시 이렇게 아니하면 안되겠다는 말입니다. 극히 적은 문제

     

    이겠지만 하도 말썽이 많은 문젠데 도시의 미관도 우리 서울, 대서울 이런 도시에 그렇게 무시할 문제는 아니겠지만 산

    사람의 사회의 일인만큼 오늘날 우리 나라에서는 대서울 도시의 미관이라는 것보다는 수많은 전재민 동포의 집 없는

    고충을 좀 알아줘야 되지 않겠어요. 누구인들 좋은 집에서 살고 싶지, 판자 집에서 살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 주택문제는 우리 나라 뿐 아니라 구라파에서도 있는 문제로써, 이들이 문제한 나라라고 해서 도시 미관상이니 위생상이니

    하고 오늘날 우리 나라와 같이 몇 만 호를 갑자기 헐어버리는 때는 없습니다. 이 문제만 하더라도 정부에서 외자물자를 많이

    받아드려 공동주택을 하루 바삐 지어서 그들에게 싼값으로 주는 것이 옳은 방법인데도 불구하고, 산 설고 물 다른 타향살이에

     

    갑자기 판자 집을 헐라고 하니 그들이 갈 곳이 어디냐 말입니다. 이것이 모두 주책없는 정책이란 말입니다. 아니 심하게

    말하면 판자 집을 헐라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좋은 양옥집에서 사니까 남이야 집 없이 헤매던 말던 아랑곳없다는 듯이

    도시의 미관이니 위생상 나쁘다는 구실을 붙여 가지고 전재민들을 못살게 하는 것밖에 안 된단 말입니다. 이것 안됩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앞으로 우리의 정부는 반드시 거국일치의 내각으로 전국의 인재를 망라해 가지고 인재 본위로 옛날에

    한말과 마찬가지로 야무유현격으로 적재 적소로 무슨 당파에 속한 사람이거나, 민주당에 당적을 가진 사람이나, 자유당에

    당적을 가진 사람이나, 그 이외에 또 무슨 당의 당적을 가졌다는 사람들이거나, 나하고 친한 사람이니 그렇게 친하지 않는

     

    사람이나, 내가 평소에 그렇게 이쁘다고 곱다고 생각을 한 사람이나, 아주 마땅하다 가깝다 생각한 사람이거나 다만 자격이

    있어 다만 이만한 인재라면 한국에 다 들러붙어서 우리 나라를 어떻게 잘 해갈 수 있고, 우리의 이 국민을 어떻게 잘 살려갈

    수 있으며, 우리의 조국을 어떻게 해야 하루바삐 통일되며, 우리 전국민이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루 바삐 안정시킬 수가

     

    있느냐 하는 이 일을 함께 해나가자는 말입니다. 이러함으로 나는 정당의 관계로 나를 괴롭혔다.나를 무시했다. 나를 모욕했다.

    더군다나 우리 나라 선거라는 것은 대통령 선거라고 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국회의원 선거보다 참 욕설이 큽디다.  국회의원

    선거 때 각지방을 돌아다녀 보면은 서로 입후보했다는 사람들이 자꾸 같이 욕을 해서 나는 그때에 그분들에게 얘기하기를

     

    “당신들은 선거 운동하는 요령을 모르니 내 얘기 할테니 들어보라”하고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입후보한 사람이 여럿이거든

    당신은 그 입후보한 사람을 자꾸 칭찬해 주라. 마음껏 칭찬해 놓고 맨 나중에 아무리 그분들이 잘났고 좋다고 하드라도 나보다

    못하다는 얘기를 조금 못하다는 얘기로 결론 내라” 나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아나 모르나 모르되 선거운동의 요령은 그래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요새 듣고 보니 대통령 선거라 그런지 도무지 욕설이 너무 많고 듣기 어려운 욕이 많습니다. 그렇지만은

    욕하는 사람이 죄지, 욕먹는 사람은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아무리 욕하던 사람이라도 내가 대신 욕하고 싶지

    않고 또 만일 내가 앞으로 전국민 동지들에게 찬성을 받아서 지원을 받아 내가 대통령으로 당선이 된다고 하더라도 나를 욕한

     

    사람들을 원망스럽다, 괘씸하다, 보고 해야겠다는 생각은 아니하겠다 하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끝으로 만일 내가

    대통령으로 당선이 된다면 서울 근처의 속담 한마디 마찬가지로 내가 만일 광주 유수를 하면은 남한산성에서 줄 불을 놓겠다.

    그런 얘기와 마찬가지로 내가 만일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하면 우리 전국민의 주인 되는 우리 전국민 동포 동지들의 심부름꾼

     

    으로 충실하게 일할 작정입니다. 그 말입니다. 결코 내가 잘났다. 이렇거니 우리 국민들은 따라와라 이런 죄스러운 생각과

    죄스러운 말은 아니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전국민 동포 동지들과 같이 괴로우나, 즐거우나, 웃음이나, 울음이나, 먹으나,

    굶거나, 똑같이 여러분과 지내보리라는 약속입니다. 높직한데 들어앉아서 국민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국민이 우는지, 웃는지

     

    도무지 모르고 너는 너, 나는 나의 격으로 그대로 살아가지는 아니할 뿐더러 언제나 여러분을 자주 자주 찾아서 어떻게들

    지내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슨 일이 있소? 하는 얘기를 묻기도 하려니와 동시에 여러분은 부단히 나를 찾아서 우리

    주인 되는 국민들은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당신은 이렇게 일해주소,하는 부탁으로 여러분이 자주 찾아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이러한 형편으로 나는 언제나 대통령이 있다는 집이라면 언제든지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여러분을 기다리겠

    습니다. 하는 말씀을 드립니다. 이 좌석도 불편한 모래사장에 수많은 여러분이 차례 없이 지껄이고 있는 이 사람의 말을 재미

    있는 것처럼 잘 들어주시니 특별히 고맙습니다.  내 말은 여기서 끝내기로 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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