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충렬사
    여 유/주변의 사진 2013. 2. 11. 01:06

     

    충렬사 정문

    충열사는 1592년 임진왜란 때 부산 지방에서 왜적과 싸우다 순절한 호국선열의 영령을 모신 사당으로 선열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한 산 교육장이자 호국충절의 요람지이다. 1605년(선조 38년) 임진왜란 때 순절한 동래

    부사 충렬공 송상현(忠烈公 宋象賢)을 봉사(奉祀)하기 위하여 동래읍성 남문 안에 송공사(宋公祠)를 건립하고

     

    위패를 모셔 매년 제사를 지내게 된 것이 오늘날 충렬사의 시작이다. 그 후 1624년(인조 2년)에 충렬사라는

    사액(賜額)이 내려지고 부산진성에서 순절한 충장공 정발(忠壯公 鄭撥)을 배향(配享)하였다. 1652년(효종3년)

    에는 지금의 자리(安樂洞)로 이전, 사당을 창건하고 강당(講堂)과 동서재(東西齋)를 지어 서원의 규모로 확장

     

    하였으며 유생을 수용할 수 있게 하여 안락서원(安樂書院)이라 칭하였다. 한편 1709년(숙종 35년)에는 동래읍성

    남문 안의 옛 송공사 자리에 별사(別祠)를 건립, 양산군수 조영규, 동래교수 노개방, 유생 문덕겸, 양조한, 비장

    송봉수와 군관 김희수, 겸인 신여로, 향리 송백, 부민 김상 등 동래 9의사(義士)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1736년(영조 12년) 별사에 모셨던 분을 충렬사에 합향(合享)하였으며, 1772년(영조 48년)에는 다대첨사 윤흥신

    공을 추배하고 송상현공과 정발장군을 따라 순절한 금섬과 애향도 충렬사 동문 밖에 별도로 사당을 지어 모셨다.

    그 후 충렬사는 몇 차례의 보수와 정비를 거쳐 1978년에 호국선열의 위업을 널리 알리고자 확장 정화하여 현재는

     

    93.823평방미터의 경역에 본전(本展)외 15동의 건물이 있으며 부산 지방에서 순절하신 93분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5월 25일에 시(市) 주관으로 올리는 제향(祭享)과 충렬사 안락서원에서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中丁日)에

    올리는 춘추대제(春秋大祭)를 온 시민의 정성으로 봉행하고 있다.

     

     

     

     

     

     

     

     

     

    송상현공 명언비

    戰死易假道難(전사이가도난)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

     

    충렬사 정화기념비

    왜적이 바다를 건너 침략 해 왔던 1592년 4월 13일은 한민족으로서 천추에 잊지 못할 통한의 날이 된다.

    고려조 때에 몽고군이 우리나라를 침략했고, 그 뒤 조선왕조 때에는 청군이 침략해 왔던 적이 있으나

    임진왜란의 불행은 이들 외침보다 몇 갑절 더 뼈저리게 느껴지는 비극이 아닐 수 없었다. 왜냐하면 경제

     

    정책의 빈곤위에 당쟁으로 국론이 통일되지 못했고 그로인해 국방이 부실해 있었던 까닭에 더욱 큰 희생을

    당해야했던 사실을 상기한다면 적에 대한 회환이 동시에 통감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맨 먼저 왜적의 침공을

    받은 부산지방의 성주와 백성들은 일치단결 최후까지 싸워 그 성과 함께 운명을 같이 했던 것이다. 부산이

     

    없으면 동래가 없고, 동래가 없으면 나라 전체가 어찌될지 모를 사정을 누구보다도 절감한 동래부사 송상현과

    부산첨사 정발, 다대첨사 윤흥신은 적을 맞아 싸운 첫날에 각각 장렬한 전사를 했고 뜻을 같이한 양산군수

    조영규 교수, 노개방 교생 문덕견 등도 저마다 맡은 부서에서 용전분투 끝에 옥쇄했다. 일신의 아픔이 나라의

     

    편안에 승화되는 드높음을 몸으로써 통감하지 않았고서야 어찌 군관민 남녀노소 모두가 한덩어리 되어 목숨을

    바칠 수 있었으며 칠 년 전쟁에 동래, 수영에서 일어난 수많은 의병의 봉기가 이분들의 순절한 높은 뜻과 어찌

    무관하였겠는가. 적의 피신하라는 권유에도 응함이 없이 마지막 나라에 하직하는 북향요배를 하고 부친에게

     

    글을 남겨 나라의 위급 앞엔 태산 같은 부모의 은혜도 뒤로 돌리지 않을 수 없음을 표한 뒤 태연자약하게 죽음에

    나아간 송상현의 늠름한 태도 그대로 대의의 무거움 앞엔 개인의 목숨이 흥모 같은 가벼운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희박한 곳에 나라의 번영을 생각할 수 없고, 나라의 안보사상이 미약한 곳에

     

    나라의 태평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 진리일진데 이곳에 충열사를 세워 손절 선열들을 추모해 왔음은 다름아닌

    이들 선열들의 충절을 만고에 기리려는 것이었거니와 이번에 박정희 대통령의 분부로 문화공보부와 부산직할

    시가 경역을 크게 중수 확장하여 정화사업을 완수한 뜻도 이분 선열들의 충절을 국민의 호국 정신으로 받들어

     

    총화단결로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고 민족중흥의 역사적 대업을 이룩하려 함에 있는 것이니 이제 우리는 선열의

    영령에 부끄럼이 없게 그막중한 은혜를 충성으로써 갚고 추손을 만대 반석 위에 안주케 할 책임을 다하기 위해

    우리 모두 가슴에 손을 얹어 멸사봉공 살신성인할 것을 굳게 맹세해야 할 것이다.

                                                                                                  1978년 5월 이주홍 짓고 배재식 쓰다

     

     

     

     

     

    기념관

    임진왜란 당시의 전황을 보여주는 6폭의 기록화와 천곡수필 등

    고서, 갑옷, 치제문 등의 유품 102점을 소장 전시하고 있다.

     

     

    소줄당

    임진왜란 당시 왜적과 싸우다 순국하신 선열들의 위국충절의 호국정신과 그 학행을 후세의

    사표로 삼기 위해 1652년(효종3년)에 교육도장으로 건립한 강당이다. 소줄당이라는 당호는

    한유의 이제송에 나오는 '소호일월 부족위명, 줄호태산 부족위고'의 머리 글자를 딴 것으로

    임진란 선열들의 충절은 일월보다도 밝고, 태산보다도 높다는 것을 나타낸 말이다. 

     

    의열각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싸우다 순국한 의녀들을 모신 사당이다. 동래성 전투에서

    기왓장으로 왜적과 싸웠던 무명의 두 의녀와 당시의 동래부사 송상현공과

    부산첨사 정발장군을 따라 순절한 금섬, 애향 두 열녀 등 모두 4명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충렬사 본전

    임진왜란 때 부산 지방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왜적과 싸우다 순국한 선열을 모신 사당이다.

    부산지역에서 전사한 선열 23명과 동래부, 부산진, 다대진 및 부산포해전에서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위패 4위, 의병 62명의 위패를 모신 충렬사의 본당이다.

     

     

    충렬관

    이곳에서의 교육과정은 정기강좌, 신청에 의한 강좌, 교원연수 등이 있다

    '여 유 > 주변의 사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손자 '이레'의 해변 일기  (0) 2013.04.17
    산앵두  (0) 2013.03.28
    바다에서 본 오륙도와 누리마루  (0) 2012.10.16
    지하철 4호선 본부  (0) 2012.09.14
    상사화의 한살이  (0) 2012.08.20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