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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시조 장절공
    평산 신씨/나의 시조 2009. 1. 6. 12:32

     

    시조 장절공 존영(始祖 壯節公 尊影)

     

    우리 평산 신씨(申氏)의 시조는 고려의 개국공신인 신숭겸(?∼고려 태조 10년, 서기 927년)이다. 신숭겸 시조는

    광해주(지금의 춘천)사람으로 초명은 능산이며 본관은 평산이다. 시조는 본래 전라도 곡성(곡성현 목사동면 구룡리,

    현 용산제)에서 태어났으나, 뒤에 춘천으로 옮겨 그곳에서 터전을 잡았다. 궁예가 후고구려를 건국하자 그 휘하에

     

    들어갔다. 공(公)은 태어나면서부터 몸이 장대(長大)하고 천성이 용맹스러웠으며 신령(神靈)한 자품(資稟)과 기민한

    지략(智略)에다가 쏘는 재주가 뛰어나 백발백중(百發百中)하였고. 참으로 장수다운 인재(人材)였다. 전장에서 많은

    공을 세워 마군 장군에 올랐다. 그러나 궁예는 신라를 멸도(滅都)라 일컫게 하고, 투항한 신라인을 모조리 죽이는 등

     

    전제군주로서의 횡포가 심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지위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자신은 미륵불(彌勒佛), 두 아들은 보살

    (菩薩:靑光菩薩·神光菩薩)이라고 칭하는 등, 백성을 괴롭히고 많은 신하를 희생시키며 호탕방일한 생활을 하였다.

    또한 무고한 많은 양민들과 신료들을 철퇴로 쳐 죽이며, 처자를 불로 지져 죽이는 등 학정이 계속되자 홍유, 배현경,

     

    지겸 등과 모의하여 고려 태조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개국원훈 대장군에 올랐다.(918년) 신씨 성은 왕건에게서 받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홍씨, 복씨성도 왕건에게서 받았다. 고려 개국 후 개국 1등 공신이 된 공(公)은 다른 공신들과

    함께 고려의 국력신장과 민족통일 작업에 몰두한다. 그러나 안타깝도 고려의 통일을 보지 못하고 전장에서 전사한다.

     

    고려태조 10년(서기927년), 견훤은 군사를 이고 경상 북부지역에서 전투를 벌이다 불현듯 회군하여 영천을 가로질러

    경주를 침공한다. 이때 신라왕(제55대 경애왕)은 종친과 신료들과 더불어 포석정에 나가서 놀다가 문득 적병이 왔다는

    소식을 듣창졸간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모두 함몰되었으며, 견훤은 경애왕을 죽이고 김부(경순왕)를 왕으로 앉혔다.

     

    견훤의 경주 침략 소식을 들은 왕건은 이를 듣고 직접 정예한 기병 5을 친히 거느리고 군대를 통솔하여 경주로 향한다.

    하지만 그때 견훤은 이미 경주에서 퇴각하여 돌아가고 있었다. 왕건은 별수 없이 공산무주(대구의 팔공산)에 진을 쳤다. 

    지금의 동화사(桐華寺)이며, 여기서 견훤을 맞아 기다렸는데 견훤이 반드시 이 길을 지나 회군을 할 것을 간파하였다.

     

    그 이유는 동화사와 파계사가 모두 견훤 세력과 깊이 밀착되어 있는 진표율종(眞表律宗) 즉 백제법상종에 속한 사찰

    신라 영토내의 견훤 세력 근거지였기 때문이다. 이에 고려군은 공산 에 이르러 길목에 매복해 있다가 견훤을 갑자기

    들이쳐 격파하니 처음에는 견훤군이 갈팡질팡하였으나 워낙 수가 많은 후백제군은 점차 수습되면서 형세가 역전되기 시작하여

     

    도리어 왕건군이 포위 속에 들게 되고 형세가 몹시 위급하였다. 병력이 열세했던 고려군은 점점 대패하였으며 태조와 장수들은

    후백제군의 포위망을 뚫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으나 허사였다. 이 전투에서 가까스왕건이 목숨을 보전한 것은 잘 알려진

    처럼 신숭겸의 지략과 충심 덕분이었다. 이곳의 마을 이름이 지묘동(智妙洞)인 것도 신숭겸 장군의 지혜가 교묘했다는 데서

     

    연유하고 있다. 대장(大將)이던 신숭겸의 얼굴이 태조와 흡사하였는데 그 전쟁의 형세가 막다른 지경에 이르렀음을 깨닫

    자 신숭겸께서 왕건대신 죽음을 자청하면서 태조의 수레(御車)에 갈아타고 태조와 갑옷을 바꿔 입고 김락(金樂)과 더불어

    힘껏 싸우다가 전사(戰死)하였다. 견훤의 군사는 신숭겸을 태조로 여기고 그 머리를 잘라서 창에 꿰어 달아나니 포위했던

     

    군사가 조금 풀리어 태조는 겨우 단신(單身)으로 위기를 모면하였던 것이다. 공산전투가 치러졌던 팔공산 일대에는 신숭겸과

    건의 관련된 설과 지명이 많이 관련되어 있다. 팔공산도 공산이였던 것을 고려 태조 왕건이 동수대전시(桐藪大戰時) 신숭겸

    (申崇謙), 김락(金樂), 전이갑(全以甲), 전의갑(全義甲) 등 팔장(八將)의 순사(殉死)로 인하여 팔공산(八公山)이라 했다는

     

    얘기가 있다. 아! 이때에 신숭겸이 지 않았더라면 포위는 풀리지 않았을 것이요. 포위가 풀리지 않았더라면 움도 이기지

    하였기에 삼한(三韓)을 통일하여 500년의 왕업(王業)을 이어받게 한 것은 신숭겸의 충절의 공(功)이 있었기 때문이지 아니한가!

    위기를 모면한 태조는 태조가 본진에 돌아와서 곧 신숭겸의 시신을 찾았으나 머리가 없어졌으므로 이를 분간할 수 없었더니 대장

     

    유금필 등이 말하기를 "신숭겸 장군의 왼발 래에 사마귀의 무늬가 있었는데 북두칠성과 같았습니다"하는지라 이 근거로 과연

    찾아내었다. 이에 목공에게 명하여 머리와 얼굴을 새겨 만들게 하니 마치 생시의 모습과 같았다. 조복을 갖추어 자리에 앉게 하여

    태조가 친히 제례를 행하고 통곡하였으며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장지(葬地)를 도선대사가 태조 왕건자신의 묘터로 정한 곳인

     

    광해소양강 비방동(現 춘천시 서면 방동리)에 예장(禮葬)하게 하고, 태조묘정(太祖廟庭)에 배향(配享)하였으며, 곡성(谷城)의

    양덕사(陽德祠), 대(大丘)의 표충사(表忠祠), 춘천(春川)의 도포서원(道浦書院), 평산(平山)의 태백산성(太白山城祠)에 제향

    (祭享)하였다. 또한 돌아가신 그 자리에 단(殉節壇)을 모으고 절(智妙寺)를 지어 장절공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공산무

     

    전투에서 고려군은 대패하여 많은 뛰어난 장수들을 잃었다. 특히 개국공신 신숭겸의 죽음은 왕건에게 커다란 패배감을 안겨

    주었다. 태조왕건은 신겸의 죽음을 슬퍼 하며 벽상호기위 태사개국공 상중대광 의경익대 광위이보 지절지정공신(壁上

    太師 開國公 三重大匡 毅景翊戴 匡衛怡輔砥節底定功臣)에 추봉하고 장절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 후 태조는 장절공의 아들

     

    보장을 원윤으로 삼고 지묘사를 창건하여 그의 명복을 었다. 신숭겸이 죽은지 약 200년 후인 1120(예종 15)에는 예종대왕이

    서경(西京:평양)에 차하여 팔관회가 열렸을 때 이였다. 가상(假像) 둘이 관복과 무장(武裝)을 갖추어 말을 타고 뜰을 뛰어

    달리며 다녔다. 임금이 이상히 여겨 이를 물으니, 좌우에서 다음과 같이 그 경위를 설하였다. '그 두 분은 신숭겸과 김락으로,

     

    조 왕건이 견훤과 싸우다가 궁지에 몰렸을 때 신성대왕(神聖大王:고려태조 왕건)을 대신해서 죽은 공신이다. 그래서 그 공을

    높이고자 태조 부터 팔관회에서 추모하는 행사를 벌였다. 태조는 그 자리에 두 공신이 는 걸 애석하게 여겨, 풀로 공신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복식을 갖추고 자리에 앉게 하였다. 이러한 설명을 듣고 임금(예종)이 초연히 감개(感慨)하여 두 신하의

     

    후손을 물으며 경, 유비, 명부(5, 6, 7세 조고:祖考)에게 벼슬상(하사품)을 내렸고, 이어 한시(漢詩)와 함께 도이장가를

    지어 신숭겸과 김락(金樂)의 공을 추도하였다.

     

    사안도(射雁圖)

     

      본관의 유래는 어느 날 태조가 여러 장군들과 평주(평산의 고호)에 사냥 나갔 다가 마침 하늘을 나는 세 마리의 기러기를 보고

    "누가 저 기러기를 쏘아 맞출 수 있겠는가?"하고 물으니, 여럿 중에서 숭겸께서 말하기를 "몇 번째 기러기를 쏘리까?"하니

    태조께서 "셋째 기러기의 왼쪽날개를 아라."하였다. 신숭겸이 몸을 번뜩여 공중을 쳐다보고 과연 화살 한 대로 단번에 날아가는

     

    러기의 왼쪽 날개를 쏘아 떨어뜨리니 태조께서 탄복하여 세 마리의 기러기가 날던 땅 삼백결(1결=15석을 생산할 수 있는 면적

    단위, 15석=300두, 1두=2말)을 하사, 별업(別業)으로 하게하고 궁위전(弓位田)이라 이름 하였으며 본관을 평산으로 삼게 하였다.

    평산은 황해도 남동쪽에 위치한 지명으로 원래 고구려 때 대곡군 또는 다화실이었던 것을 신라 경덕왕이 영풍으로 고쳤으며, 고려

     

    초에 평주로 하였고 1272년(원종 13) 부흥군에 합쳤다가 충렬왕 때 다시 복구하였다. 1413년(태종13)에 평산으로 바꾸고 도호부로

    승격하였으며, 고종 때 군이 되었다. 평산 신씨는 조선후기에 세력을 떨쳐 조선의 대표적인 명벌(名閥) 가문(家門)으로 알려졌다. 

     

     

    충렬도(忠烈圖)

     

    대장(大將)이던 신숭겸의 얼굴이 태조흡사하였는데 그 전쟁의 형세가 막다른 지경에 이르렀음을 깨닫게 되자 신숭겸께서

    왕건대신 음을 자청하면서 태조의 수래(御車)에 갈아타고 태조와 갑옷을 바꿔 입고 김락(金樂)과 더불어 힘껏 싸우다가

    전사(戰死)하였다.

     

     

    동상(銅像)

     

    장절공 신숭겸 장군의 동상은 탄생지인 전남 곡성군 구룡리에 있는 용산단 경내와 순절지인 대구 동구 봉곡동 파군재 삼거리와 묘소가

    있는 강원도 춘천시 서면 방동 경내에 모셔져 있다.

     

    장절공 묘소(강원도 춘천시 서면 방동)

     

    장절공의 묘소에는 봉분이 셋인데 장절공의 머리를 금으로 만들어 예장하면혹시 엿보는 사람이 있을까 염려하여 봉분을 셋으로

    만들었다고도 하고, 또는 부인을 합장한 것이라고도 하나 어느 봉분이 옳은 것인지 알 수 없으므로 제향은 중앙의 봉분 앞에서

    행하고 있다. 묘소는 도굴꾼들이 수차례 도굴을 시도 하였으나 그 때마다 발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아 모두 잡혔다고 하고, 일제시대

     

    에는 일본장교가 말을 타고 묘소 앞을 지나자 말발굽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아 내려서 분향 후 지나갔다고 한다. 장절공 신숭겸의

    묘역은 춘천 박사마을로 유명한 서면에 있으며 풍수지리학의 묘터로도 유명하다. 이 묘역은 우리나라 4대 명당지(明堂地)의

    하나로 손꼽히는 곳으로 울창한 소나무가 좌우에 도열하고 있는 듯 있으며 묘역을 비롯 영정각, 신도비각, 기념관, 재실 등이 배치

    있다. 음력 3월 3일과 9월 9일에 향사한다.

     

     

    ☞ 가는 길

    경춘 국도를 달려 강촌, 등선폭포를 차례로 지나면 의암대교를 만나게 된다. 여기서 건너기 전 좌측 길로 접어들어야 하는데,

    실제 도로는 우측으로 빠져 의암대교 밑을 지나간다. 여기서 을 놓치고 의암대교, 의암터널을 지나면 되돌아와야 한다.

    의암대교 밑을 지나 북한강을 끼고 잠깐 달리면 우측으로 의암댐이 나온다. 의암댐을 건너지 말고 계속 직진. 의암댐부터 이어진

     

    길은 403번 지방도로로 환상의 드라이브코스다. 의암호 건너편에서 봉의산과 춘천 시가지를 볼 수 있어 이 고장이 물의 고장이며

    호반의 도시라는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한다. 호수의 여기저기에는 울긋불긋한 낚시꾼들의 좌대와 낙엽처럼 떠있는 재첩

    잡이 나룻배가 폭의 동양화처럼 펼쳐져 있다. 고인돌, 적석총 등 청동기 시대 문화유적의 보고인 중도를 바라보며 이 도로를

     

    5분쯤 더 달리면 길 좌측으로 성어촌이란 식당이 있고 식당 옆으로 현암교라는 작은 다리가 있다. 이 다리를 지나자마자 묘소입구

    간판을 따라 좌회전하여 실개천을 끼고 잠시 오르다 보면 우측으로 울창한 송림안에 신숭겸 묘역이 있다.(강원도 지정기념물 21호)

    평산신씨는 전체 신씨의 70%이상을 차지하는 것으로 추산되는 현존하는 신씨 가운데 대본이며, 역사상 가문을 빛낸 인물들도 평산

     

    신씨의 후손들이 대다수차지한다. 신씨는 고려와 조선을 거쳐 현대를 잇는 역사의 흐름속에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하였다.

    신(申)씨 본관은 평산(平山), 고령(高靈), 주(鵝州), 영해(寧海), 은풍(殷豊), 천안(天安), 이천(利川), 신천(信川), 곡성

    (谷城), 삭녕(朔寧), 창주(昌州) 등 50여 본이 전한다. 그 중 평산 신씨가 약 70% 이상, 고령신씨가 약 20%를 차지한다. 참고로

     

    같은 한글의 신씨는 영산, 영월 신씨(靈山, 寧越 辛氏), 거창 신씨(居昌 愼氏) 등이 있다. 신씨는 1985년도 국세청조사에서는

    인구 62만 950명(평산신씨 460,238명)으로 전국 인구 구성비는 1.5 %로 274성 중 제12였다. 평산 신씨 파계는 시조의 15대

    손에서 19개파로 갈리는데, 문희공파(文僖公派)가 30%, 사간공파(思簡公派)30%, 제정공파(齊靖公派)가 25%를 차지한다. 평산

     

    신씨는 조선 후반기에 세를 떨친 명문으로 相臣(영의정, 좌의정,우의정) 8명, 대제학(홍문관과 예문관의 장) 5명, 판서 20명

    문과 급제자 302명을 배출했다. 그 중 문희공파(文僖公派), 정언공파(正言公派), 사간공파(思簡公派)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다.


    ◈문희공파, 

    문희공파의 대표적 인물로, 문희공 신개(나에게 19대조)는 세종 때 예문관 대제학을 지내고 고려사(高麗史) 수찬(修撰)에 참여했고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 그 분의 주요이력을 보면, 문희공 신개(文僖公 申개;1374 공민왕 23∼1446, 세종 28)께서는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자격(字格),호는 인재(寅齎), 대재학 신집(申집)의 손자, 아버지는 고려 때 종부시령(宗簿寺令)을 하시고

     

    고려가 망하자 태조 이성계가 수 차례 벼슬에 나올 것을 권유하였으나 평산 황의산에 은거하신 申晏(이성계가 좌의정에 추종함)

    이시며, 어머니는 문하찬성사(門下成事) 임세정(任世正)의 딸이다. 1390년(공양왕 2)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393년(태조 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檢閱)로 발탁되었는데, 당시 태조가 실록을 보자고 할 때 그 불가함을 강력히 논하였다.

     

    이를 계기로 그 후에도 자주실록 열람을 원하는 임금들에게 간(諫)하는 신하들의 좋은 구실이 되었다. 이어 감찰, 문하습유(門下

    拾遺),좌정언,형조좌랑,호조좌랑을 거쳐 충청도도사 나갔다가 다시 헌납,이조정랑, 사인(舍人),예문관제학, 판승문원사(判承文院

    事) 등을 역임하고, 1413년(태종 13) 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로 발탁되는 동시에 춘추관편수관,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간관(諫官)으로 있으면서 주장한 의정부서사제도(議政府署事制度)의 폐지는 다음해에 실현되었다. 그 뒤 예조참의,병조참의,충청도

    찰사,한성부윤을 역임하고 1417년에 공조참판거쳐 공조판서에 올랐으며, 이 해에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세종

    즉위 후 전라도, 경상도, 황해도의 도관찰사(都觀察使)를 역임하고 형조참판(刑曹參判), 진주목사, 우군총제, 좌군총제, 예문관대

     

    제학, 전라도관찰사, 중군도총제(中軍都摠制),대사헌 등을 역임했다. 1433년(세종 15)에는 야인이 자주 변경을 침입해 큰 피해를

    입히자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벌을 강력히 주장하여 야인들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이 해에 이조판서가 되고, 이듬해 이조

    판서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형조판서를 거쳐 우참찬(右參贊)에 올라 지춘추관사를 겸임하면서《고려사》

     

    편찬에 참여하였고, 1436년에 좌찬성(左贊成)을 지낸 후 세자이사(世子貳師), 집현대제학을 겸임하였다. 1439년에 우의정에 올랐

    으며, 1442년에는 감춘추관사로 권제 등과 더불편찬한 《고려사》를 완성하였다. 1444년에 궤장을 하사받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이듬해 좌의정이 되었다. 재상으로 있으면서 공법(貢法), 축성(築>城) 등에 있어서 백성들에게 불편한 것은 이를 건의

     

    하여 시정하도록 하였다. 공(公)은 자준(自準:찰사를 역임), 자승(自繩:대사성을 역임), 자형(自衡:집의를 역임) 세 아들을 불러

    놓고 대대로 물려내릴 가훈을 다음과 같이 정하여 가르쳤다. 언충신, 행독경, 소심익익, 대월상제(言忠信, 行篤敬, 小心翼翼, 對越

    帝)의 유훈을 받은 3형제는 모두 벼슬길에 나가 관직을 지내며 후대에서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시켜 평산 신씨의 중추적인

     

    인물이 되었다. 73세에 세종의 묘정(廟廷)에 배향(配享)되었으며, 묘소는 황해도 평산군 세곡면 광평리에 있고, 시호는 문희(文僖)

    이다. 저서로 《인재문집》이 있다. 신개의 증손 신상은 중종 때 호당을 거쳐 판서를 지냈는데 이 파의 주요 인물은 모두 그의

    후대에서 나왔다. 상의 손자 신잡(申잡)은 선조 때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 평천부원군(平川府院君)에 봉해졌고, 그의 아우가 임진

     

    왜란 때 명장인 충장공(忠壯公) 신립이다. 신립의 아들 경진(景진)·경유(景裕)·경인(景인) 3형제가 모두 무과 출신으로 인조

    반정에 공을 세우고 정사공신(靖社功臣)이 되었다. 특히 충익공(忠翼公) 신경진은 병자호란 때의 명장으로서 인조 영의정에

    올랐다. 조선조에서 무과 출신으로 영의정까지 오른 사람은 그와 순천박씨의 박원종(朴元宗) 두 사람뿐이다. 문희공파에서만

     

    장신이 14명이 나왔으며,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문장공(文莊公) 신완(申琓), 조선 후기의 서화가인 자하(紫霞) 신위(申緯)·

    애춘(靄春) 신명(申命衍)부자도 문희공파의 인물이다. 특히 문희공파는 임진왜란 때 명장 신립(申砬) 장군을 대표로 하는 무신

    집안 으로 특징 지어진다.

     

    표충사 (表忠祠,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

     

     

    표충사는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 526번지에 있으며, 신숭겸 장군이 왕을 대신하여 전사하신 거룩한 순절의 땅이다.

    927년(고려태조 10년) 고려 태조가 신숭겸 장군의 순절을 애통히 여겨 순절단을 쌓고 지묘사를 창건하여 영정을 모시고 명복을 빌게

    하였으며 토지도 내렸다. 1607년(선조 40년)에 없어진 지묘사 자리에 경상도 관찰사 유영순이 영남의 사람과 의논해 충렬사와 충렬비를

     

    세웠으며, 1672년(현종 13년)에 표충사로 사액(賜額)되었다. 1982년에 대구광역시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1988년 정부의 지원으로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1993년 4월 5일(한식)에 영정과 위패를 봉안하여 향사를 받들고 있다.

     

    용산단(龍山壇, 전남 곡성군 구롱리181)

     

     

    곡성 읍내에서 남으로 약 50리 가량에 비래산 아래 구룡리가 있으니 이 곳이 시조 장절공이 태어 난 곳이다.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유적들이 많은데, 독서당, 신공정 사대(射臺)는 비래산 도장동에 있고 치마대 철갑암 장군천은 화장산에 있다. 그밖에도

    장군등, 계마석, 용소, 용탄의 목욕처 등이 있다. 고종 무진년에 후손 명희가 후손 보국, 헌과 판서 석희에게 순모하여 종계의

     

    자재로써 원림 및 전토를 매입하고 초목을 금하여 이를 수호해 오다가 30年後인 고종 정유년에 유허비 세웠더니, 순종후 1929년에

    이르러 사론에 의하여 설단하고 방명을 따라 용산단이라 하여 秋九月 중정일로써 다례를 행하며 1960에 용산재와 구문이 단 아래

    창건 되었으며 1981년에 전라남도 지방문화재(기념물 제56호)로 지정되었다. 2003년에 정부지원으로 경내 전 건물을 새로 중건

    하였으며 2004년에 시조 동상이 건립되었다.

     

    덕양 서원(德陽書院, 전남 곡성군 오곡면 덕산리36 

     

    곡성 읍내에서 동남쪽으로 5里 쯤 되는 지점에 있는 천덕산 아래에  있는데, 방명은 梧枝요 액호는 덕양이니, 곧 고려삼중대광

    태사개국장절공 신숭겸을 향사한 곳이다. 장절공이 태어 난 곳이므로, 宣祖22년 (西紀1589)에 후손인 현감 옥이 관찰사인 이공

    '광' 및 도내향중의 내외 후손들과 더불어 서로 합모하여 창건한 것이다. 숙종21년(西紀1695)에 본현 사림의 소청에 따라 은액이

     

    선사되고, 또 복호 삼결을 내리었으며, 예관을 보내어 치제하였다. 고종8년(西紀1871) 조령으로 인하여 훼철되었다가 순종후

    西紀1934년에 본도에 거주하는 후손이 탄성하여 복설하고 매년 음력 2월 8일 중정일에 유림 주관으로 향사를 봉행하고 있다.

    1981년 지방 기념물 56호로 지정 받았으며 1986년부터 10여년에 걸쳐 국고 보조로 경내 전 건물을 신축 복원하였다.

     

    영각 유허(影閣遺墟, 대구광역시 동구 평광동108) 

     

    영각유허는 대구시 동구 실왕동에 있는데 장절공 영정각이 있던 곳이다. 장절공의 영정이 지묘사에 봉안되었더니 절이 헐린

    뒤로는 이 곳 대비사로 옮겨지고 거승들이 수호해 오다가 순조19년(西紀1819)에 김철득의 투장 흉계로 절과 영정이 모두

    피화되었다. 그런 뒤 순조28년(西紀1828)에 사인 최심의 고변으로 자손들이 비로소 알고 연달아 영과 부에 쟁송하여 관에서

     

    파내고 설욕한 다음 동 32년(西紀1832)에 영각유허비를 세웠다. 입비후로는 매년 중구절에 제례를 행하며 재사를 창건하였는데, 

    모영재라고 한다.

     

    율리사(栗里祠,충남 서천군 비인면 율리)

     

     

    율리사는 비인현 북쪽 10리 가량인 검성의 동쪽 율리(현. 충남 서천군 비인면 율리 193)에 있는데 철종 원년 서기 1850년에

    이 지방의 유림들의 사론으로 사우를 창건하여 세덕사라 편액하고, 이듬해 2월에 장절공 휘 숭겸과 참판공 휘 철과 승지공

    휘 욱을 봉안하였더니 고종(서기 1871년)때 조령으로 인하여 훼철되었다. 그 후 1892년에 또 다시 지방 유림들의 공론으로

     

    사지에 설단하고, 1900년에 이르러 한림공 휘 혼과 대제학공 휘 연과 온수감공 휘 기를 추배하였다. 1918년에 사론으로 사우를

    중건하고 율리사로 개칭하여 매년 음 3월과 8월 중정에 제향을 봉행하였으며 1920년 8월 23일 문정공 불훤재 휘 현을 배향하여

    7위의 위패가 봉안되었고 1988년 봄에 정부의 지원으로 강당의 개. 보수, 외삼문 신축, 담장 개축, 관리사 신축, 진입로 개설,

     

    사우의 단청등으로 면모를 일신하고 동년 8월 30일 자로 충청남도 지방 문화재 제303호로 지정 되었으며, 다음해부터 춘계

    제향(음, 3월 중정 단일제로 향사한다.

     

    경백사(景白祠, 경남 사천시 용현면 온정리 

     

    경백사는 사천군 南쪽 20里 가량인 성박산 아래 온천의 남쪽에 있다. 갑자년에 후손 영릉참봉 상이 그의 사종제 환, 건과 더불어

    평산 태백산성 태사사에 가서 장절공 철상을 모사해 오고 1926년 봄에 사우를 창건하여 봉안하면서 편액하기를 경백이라 하니 

    태백산성을 경앙하는 뜻을 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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